요즘 ‘넷플릭스’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즐겨 본다. 한국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장르인 탓에 처음 봤을 때는 적잖이 놀랐다. 추레한 행색의 코미디언 한 명을 보기 위해 모인 관객들이 3층짜리 콘서트홀을 메웠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코미디의 내용이었다. 정치, 성, 종교, 인종차별 등 사회적 금기로 여겨지는 주제에 대해 거리낌 없이 농담을 던지는 모습은 ‘저런 말을 하고도 멀쩡히 살아 있을 수 있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신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끔 카메라에 잡히는 관객 중 무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미디언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아마 제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많은 것 같은데, 상관없어요.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린데요.” 

웃음은 기묘하다. 사람들은 유머러스해지고 싶어 하지만, 우스워지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웃음은 호감과 권력의 상징이 될 수도 있으나 조롱과 혐오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웃음은 칭찬인 동시에 폭력이다. 이런 양면적인 웃음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어린 시절의 나는 종종 친구들에게 웃음을 빙자한 상처를 주곤 했다. 기가 막힌다고 생각한 농담이 기가 막히게 사람 속을 후벼 파고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개그맨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것을 깨달을 즈음에는 이미 친구가 다른 아이들과 급식을 먹고 있었다. 그렇게 철이 들면서 나는 머릿속의 짓궂은 유머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스스로 재갈을 물리고, 조금이라도 날카로워 보이는 농담은 재빨리 집어삼키는 생활의 지혜를 터득했다. 가끔 말을 아예 안 한다는 부작용이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런 점에서, 불편한 일들이 많아지는 요즘 같은 시대에 지상파 코미디 프로그램의 씨가 마르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이 농담은 혐오적이고, 저 농담은 불경하다. 감히 농담 따위의 소재로 쓸 수 없는 것도 많아졌다. 그런 대단하고 예민한 문제를 웃음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 풍자는 꿈도 못 꾼다. 금기를 어기는 자에게는 어김없이 댓글의 심판이 시작된다. 죄목은 ‘내 기분을 불편하게 만든’ 것이며 형벌은 ‘입을 틀어막는 것’이다. 입에 물린 재갈은 생각마저 숨죽이게 하고,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네 말이 맞아” 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에는 들지 않을지언정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앵무새로 가득 찬 광장은 건전한 토론의 장이 될 수 없다. 내 의견이 언제나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른 이의 생각을 존중하며 더 나은 해답을 찾아야 한다. 모든 주장에 동의하라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야기가 똑같이 귀 기울여 들을 만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저 말할 수 있게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동의하지 않는 의견에는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내버려 두고, 들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은 자연스럽게 다른 목소리에 묻히게 놔둬야 한다. 내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하는 코미디언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도 그의 마이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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