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번 학기에 듣고 있는 여성문학 수업에서 발표를 하나 했다. 원래도 달변가는 아니었지만, 어떤 내용을 발표하면 좋을지 며칠 동안 고심해 내용을 정리해 두었는데도 막상 입을 떼고 보니 ‘말을 너무 못해서’ 발표를 망치고 말았다. 괜히 상심이 컸다. 신문사에서 늘상 하는 업무라는 것이 글쓴이의 의도가 청자에게 가닿을 수 있도록 표현을 갈고 닦는 일의 반복이라, 여성 문제와 비판적 인종 이론에 관해 나름 고민한 흔적이 분명한 언어로 영글지 못하고 힘없이 흩어져 버린 것이 아쉬웠고, 또 당황스러웠다. 발표를 하면서 흑인 여성들이 처한 모순적인 환경에 대해 명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왜 그들의 존재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일까? 어째서 문제를 드러낼 언어를 찾지 못했던 것일까?

돌이켜 보면 나는 현실의 문제를 탐색할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줄곧 의식해 왔던 것은 문제의 ‘답’이었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인간 실존의 해답은 무엇일까, 이 사회에 자리하는 수많은 모순과 부조리의 해답은 무엇일까. 성현의 삶을 따라 걷거나 이상적인 사회를 상상한 이들에게 이입하며, 현실을 살아가는 일그러진 내 모습을 완전한 존재로 탈바꿈해 상상하곤 했다. 나의 일상적인 감각을 시들게 하는 환경, 사람, 사회적 문제들을 흘긋 쳐다보곤, 미련 없이 돌아서서 머릿속의 이상을 불리는 데만 마음을 쏟았던 것이다. 그러는 중에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시선을 더 높은 곳에 두는 데 치중하는 습관이 생겼다. 나를 모순 없는 더 높은 세계로 데려다 줄 답은 도대체 무엇일까. 

모순과 위선을 떠나 살고 싶은 내게 현실은 점차 희미해졌다. 답을 찾는 와중에 나는 답이 없는 문제들을 소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주변 사람들을 신음하게 하는 답이 없는 문제들, 내가 속한 공동체를 파괴하는 답이 없는 문제들, 날마다 뉴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회를 조각조각 파편화하는 답이 없는 문제들. 앞뒤가 안 맞는 그 모든 것들에 조소를 보내면서 나는 계속 꿈만 꿨다.

그러는 가운데 나의 언어는 점점 더 빈약해졌다. 모순적인 것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으니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에 얹을 말이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 아름답고 좋은 대상을 찬미하는 것만으로도 언어는 그 수고를 다한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힘들었던 날에는 일기장에 적을 말이 떠오르지 않았고, 내가 경험하거나 목격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불필요하거나 심각하게 수고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스스로와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일, ‘표현하는 일’에 열의를 잃어버린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 내가 발표에서 흑인 여성의 삶과 이들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충분한 언어를 획득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테다. 모순에 대해 표현하기를 거부한 순간, 나는 언어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계적으로 기사를 고치던 내 모습을 다시 돌아보았다. 타성에 젖어 있었던 것은 나였을지도 모른다.

모순의 그림자가 두려워 내 마음에 이를 경계하는 불을 밝힌다고 해서 온 세상에 그 빛을 드리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답이 없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그래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 ‘끊임없이 언어를 구하고 표현하는 일’임을 이제는 안다. 내가 경험한 많은 사건들, 내가 발견한 존재들에 대해 이야기할 언어를 계속 구성해 나가는 일 말이다. 세상은 여러 이질적인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며 답이 없는 문제들을 끊임없이 빚어내는 공간이다. 각자의 존재에 합당한 언어를 찾고 도처에 산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담론의 장을 만드는 것만이, 인간이 답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지 않을까. 아무리 모순이 가득하더라도 우리는 치열하게 계속 표현해야만 한다는 것을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좋았을 걸, 후회의 마음을 담아 여기 작은 이야기를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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