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고 있어요

어쩌자고 여기에 왔나. 

설아는 복도 벽에 등을 기댔다. 주르륵 몸이 미끄러졌다. 시멘트 바닥에 닿은 부분부터 엉덩이가 싸늘해졌다. 얄팍한 지갑 하나 든 채로 향한 곳이 하필 왜 전에 살던 빌라였는지,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동현관 비밀번호가 바뀌기라도 했더라면 그나마 건물 안에도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익숙한 현관문 앞에 주저앉은 채,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설아는 움찔거렸고 몇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서는지 귀를 기울였다. 6층에서 문이 열리면 내릴 사람에게 수상하게 보이지 않아야 하니까. 복도 바닥을 얇은 선으로 나누던 볕뉘가 더 길어지고 옅어졌다. 슬리퍼를 신은 발이 시렸고 엉덩이는 얼얼하다 못해 감각이 없어지려고 했다. 망설이던 설아는 몸을 일으켰다. 기껏 왔으니까,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라고 생각하며 옆집이었던 602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일 층은 필로티 구조의 주차장이었고 이 층부터 육 층까지 한 층에 세 집씩 사람들이 살아서 총 열다섯 가구가 거주하는 빌라였다. 설아는 첫 교복을 사기 전부터 키가 더 이상 크지 않을 때까지 여기서 자랐다. 602호에 살던 사람은 한 서른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종종 옥상에서 마주치는 바람에 알게 되었다. 보통 해질녘에, 오 미터쯤 거리를 두고 나란히 난간에 붙어 서서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서로 별달리 알은체를 하지는 않아도 하늘이 주홍빛에서 보랏빛을 지나 검푸른 빛으로 물드는 시간을 공유한다는 건 어쩐지 기분이 묘해지는 일이었다.

문에서 찰칵 소리가 났다. 체인을 걸어 둔 문이 한 뼘 간격으로 열렸다. 설아는 한 뼘 너머의 여자를 보고 멍청히 섰다. 

낯선 사람이었다. 

…집주인이 바뀌었나요?

뭐라고요? 

아니, 이게 아닌데. 대뜸 이런 말을 하면 너무 무례한 건데. 뭔가 다른 말을 해야 하는데. 여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하고 설아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문이 철컥 하고 닫혔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막막하게 돌아서려는데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체인이 걸려 있지 않았다. 

일단 들어와요. 

뜨겁게 데운 아랫목이 아니라 미지근한 마루인데도 밟자마자 발가락이 욱신거려서, 설아는 그제야 자기가 추운 곳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귀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살갗에 덮인 살얼음이 조각조각 깨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현관 가까운 거실 한구석에 어정쩡하게 섰다. 가로 세로로 네 칸인 나무 책장이 거실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칸마다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책장의 맞은편엔 2인용 패브릭 소파와 카세트테이프가 놓인 협탁이 있었다. 협탁 옆에는 철 지난 크리스마스 트리가 금색 방울을 매달고 서 있었다. 창가 가까이에 선 여자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다문 입매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처져 있었다. 살짝 가늘어진 눈매가 날카로웠다. 

누구 찾아왔어요? 

전에 여기 살던 분이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생겼는데요? 

단발에… 갈색 머리. 키는 저랑 비슷했고, 동그란 안경을 썼고, 쌍꺼풀이 진했어요. 

친했어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냥 인사하러 왔어요. 

인사. 

나지막이 되뇌고 여자는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잠깐 몸이나 녹이고 가요. 커피 탈 건데, 마실래요? 

저는 괜찮아요. 진짜로요. 커피 마시면 잠도 잘 못 자서요. 

그럼 차나 한잔 마시고 가요. 예전에 물 대신 마시던 거 있어. 

흐릿하게 김이 오르는 머그컵을 두 손으로 잡고 설아는 잘게 몸을 떨었다. 따뜻하다. 루이보스 차에서는 보리와도 다르고 결명자와도 다른 향과 맛이 났다. 설아는 컵을 입에 갖다대면서 곁눈으로, 소파 옆자리에 턱을 괴고 앉은 여자를 훔쳐보았다. 모호한 사람. 삼십대 중반쯤 되었을까, 더 되었을까. 저렇게 매서운 눈매를 하고,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뜸 집에 쳐들어온 애한테 차를 대접해 주고 나란히 앉아서. 뭘까. 이 사람은 뭘 믿고? 내 뭘 믿고? 

뭘 그렇게 힐끔힐끔 봐요. 

죄, 죄송합니다. 

학생 이름은 뭐죠? 

한설아라고 합니다. 

뭐라고?

한, 설, 아, 요. 

한설아. 설아. 그렇구나. 전에 살던 사람 얘기나 해 줘요. 어떻게 알게 됐는지. 

하루는 옆집 여자가 설아에게 사탕을 준 적이 있었다. 설아가 옥상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저무는 해를 등지고 서 있었다. 뉘엿뉘엿한 햇살에 등을 적신 채 난간에 기대 있는 여자를 보면서, 설아는 해가 지는 광경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너무 슬픈 사람일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아마 설아에게 그날이 유난히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를 보느라고 눈부신 것도 아닌데 자꾸 눈물이 나서 목구멍이 뜨거웠다. 그때 여자가 다가와서는 주머니에서 막대사탕을 꺼내 건네주었다. 딸기크림 맛이었다. 얼떨떨하게 고맙다고 웅얼거리고 껍질을 까서 입에 물었다. 입 안에서 그 달콤한 것이 설아의 속에 엉겨 있던 감정들을 녹이면서 동그랗게 작아지는 것 같았다. 옆집 여자와 한두 마디씩 안부를 묻게 된 게 그날부터였다.

길지도 않은 이야기였는데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일월 중순, 해가 짧은 계절이었다. 

이제 슬슬 갈게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래, 곧 어두워지니까 너무 늦기 전에 가야지. 어디로 가요? 

그냥… 요 근처 찜질방 갈 거예요. 

찜질방에 간다고? 혼자? 몇 살인데. 

스무 살이에요. 

애기네. 

성인인데요. 생일도 지났어요.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진짜 애기네. 얼른 집으로 가. 

내일 갈게요. 오늘만 찜질방에서 자구요. 

고집불통이네. 

쏘아보는 듯한 눈빛이 매서워서 설아는 고개를 슬쩍 돌려 눈을 피했다. 

정 그러면 오늘만 여기서 자고 가. 내일은 집으로 가야 한다. 나 늦게 일어나니까 얼굴 안 보고 가도 돼. 배고프면 라면이나 끓여 먹고 나가. 먹은 거 설거지는 하고. 

그래도 돼요? 

얼떨떨해져서 설아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근데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연정. 조연정. 

설아는 입속으로 연정, 이라는 이름을 굴려 보았다. 눈송이처럼 여린 맛이 났다. 

혹시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저기요나 언니나 뭐, 그런 건 좀 버릇없는 것 같아서. 

그래라. 

정오가 되기 십 분 전, 아침이라기엔 지나친 시간에 연정은 아침 세수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서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설아를 보고는 눈을 찡그렸고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쇠수저 한 벌과 밥그릇에 담긴 하얀 주걱을 보고는 멈칫했다. 밥솥을 열었더니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자고 일어났는데 밥이 돼 있는 게 새삼 오래전 일인 것 같아서 연정은 밥통 앞에 오래 서 있었다. 그릇을 식탁에 내려놓는 달그락 소리에 설아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셨어요. 

큼큼 목을 가다듬고 설아가 덧붙였다. 

죄송해요. 남의 집에서 허락 없이 뭐 만지는 거 아닌데. 밥이 없길래 밥만 했어요. 다른 건 안 건드렸어요. 

뭐야 너, 우렁각시니? 

설아가 잠긴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 그런 농담 같은 대사를 치기엔 과하게 심각한 표정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밥은 먹었니. 

아직요. 

언제 일어났는데. 

일곱 시쯤이요. 다시 잤지만. 

배고팠겠네. 밥 먹자. 

반찬통에 담긴 오이소박이와 깻잎김치가 거실 책장과 같은 색깔의 나무 식탁에 올라왔다. 한동안 수저가 그릇에 잘게 부딪는 소리만 났다. 

선생님은 혼자 사세요?

…응.

저도 혼자 살고 싶어요. 

혼자면 좋을 줄 알고?

좋기만 하진 않겠죠. 뭐가 제일 나쁜데요?

연정은 답하지 않고서 깻잎김치로 젓가락을 가져갔다. 깻잎이 한 장씩 잘 떼어지지 않는 것 같아서 설아는 밑에 들러붙어 있는 깻잎을 눌러 주었다. 연정이 밥숟가락 위에 깻잎을 얹고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생각해봐, 깻잎 잡아 줄 사람도 없어. 

물 만 밥에 깻잎을 올려 먹는 소박한 식사였지만 연정은 어쩐지 뱃속이 데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설아가 식탁을 정리하는 동안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다가, 문득 떠오른 어조로 연정이 물었다. 

오이소박이가 쉬진 않았었지?

네, 괜찮았어요. 좀 새큼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럼 됐어. 내가 오이를 잘 안 먹어서, 오랜만에 꺼낸 거거든. 계속 냉장고에 있긴 했는데. 

모르고 쉰 걸 줬을까 봐, 라고 덧붙이는 연정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라고 설아는 생각했다. 냉장고에 있는 반찬이라고는 둘뿐인데 그 중 하나를 먹지 않는 사람이라니. 

혼자 산 지 얼마나 되셨어요?

나와서 산 지는 꽤 됐어. 십 년도 넘었지. 

잠깐의 침묵 끝에 연정이 찬장 구석에서 깡통을 꺼냈다. 콜라 맛 사탕의 껍질을 까서 입에 물더니 설아에게 딸기 맛 사탕을 건넸다. 

그렇게 드셔도 괜찮으세요? 

뭐가. 

냉장고가 텅 비어 있던데요. 라면만 가득 있고. 

라면 맛있잖아. 편하고. 

정 그러시면 계란이라도 넣는 건 어때요. 파나 양파도 있고. 아님 버섯 같은 거. 

라면에 버섯을 넣니?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넣으면 은근 맛이 달라져요. 내일 제가 사 올까요? 느타리버섯. 

내일? 

설아가 눈을 슬그머니 피했다. 연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할 거 없으면 책이나 봐라. 우리 집에 책은 많아. 

아무거나 봐도 돼요? 책장에 있는 거. 

응.

설아는 그날 저녁 책을 읽다가 소파에서 잠들었다. 다음날엔 근처 슈퍼에서 느타리버섯과 양파와 달걀을 사왔고 그 다음날에도 그 집에 있었다. 코를 갖다 대면 희미하게 나프탈렌 냄새가 나는 솜이불이 장롱에서 나와 거실 구석을 차지했고 화장실엔 새로 뜯은 칫솔이 놓였다. 설아는 그 집의 샴푸와 린스와 바디워시와 폼클렌징을 썼고 세탁기에서 꺼낸 속옷과 양말을 함께 널고 바삭하게 마른 수건을 반듯이 갰다. 연정은 머리카락이 굴러다닌다 싶으면 바닥을 쓰는 사람이었고 설아는 밥다운 밥을 해먹기를 귀찮아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생활은 무던히 맞아떨어졌다. 느지막이 일어나는 연정의 리듬에 맞춰 점심을 해먹고 설거지를 하고 저녁을 해먹고 설거지를 하면 해가 졌다. 그 사이의 시간 동안 연정은 줄곧 커피를 마셨고 설아는 가끔 루이보스 차를 마셨다. 주로 식탁에 앉거나 소파에 누운 채로 책을 읽었고 카세트테이프로 낡은 음악을 듣거나 시시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아직도 2G를 쓰세요? 

그러는 넌 왜 핸드폰도 없어?

…저는 고3이었잖아요. 

얼씨구. 

선생님 웃는 거 완전 독특해요. 

그래?

입꼬리를 아래로 내리면서 웃으시잖아요. 

내가 그랬나?

맨날 그러시는데요. 어떻게 웃는데 입술이 아치예요, 아치. 

너는. 눈썹 다 찡그리고 웃으면서. 

제가요?

그래.

왜 이렇게 눈이 안 오냐. 

그러게요. 이번 겨울은 유난히. 선생님 눈 좋아하세요?

아니, 딱히. 그건 아닌데. 

별것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연정은 늦게 일어나는 만큼 늦게 잤다. 설아는 오전에는 연정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올 때까지 기다렸고 밤에 연정이 잠드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설아는 연정이 자기 전에 꼭 양치를 한다는 걸 알았다. 거실에서 자다가 보면 연정이 살금살금 바닥을 딛는 소리나 화장실 문이 점잖게 여닫히는 소리가 잠결에 들렸기 때문이다. 쉽게 깨는 설아와 달리 연정은 잠귀가 어두워서 아침에 설아가 부스럭거리거나 달그락거려도 좀처럼 뒤척이지 않았다. 설아는 밤중에 손톱을 깎으면 손등을 맞으며 자랐는데 연정은 그 스스로가 밤에 손톱을 깎는 사람이었다. 연정이 찬장 구석에서 손톱깎이를 찾아오면 설아는 밑에 받칠 종이를 찾았다. 똑, 똑, 손톱깎이가 입을 다무는 소리 뒤에 툭, 툭, 깎인 손톱이 종이와 입맞춤하는 소리가 따라왔다. 툭, 하는 소리가 뒤따라오지 않으면 설아는 곧바로 손바닥을 펼쳐 바닥을 훑었고 연정은 이따 쓸자, 라고 설아의 손등 위에 말을 내려놓았다. 스무 개의 손톱이 바짝 단정해지면 설아는 너그럽게 웃는 손톱 쪼가리들을 종이 중앙으로 그러모았다. 연정이 작은 빗자루를 들고 와서 마루를 쓸었다. 쓰레받기에 자디잔 초승달들이 쌓였다. 쓰레기통에 손톱을 버릴 때 설아는 은밀하고 소소한 해방감을 느꼈다. 연정은 설아의 부피에 익숙해졌고 설아는 연정의 습관에 길들었다. 

카레 해 먹을까. 

카레요?

응. 오랜만에. 

카레, 카레, 설아는 몇 번 입속말로 되뇌었다. 뜨끈하고 칼칼하고 노랗고 걸쭉한 국물이 금세 목구멍에 고이는 것 같았다. 

뭐 사 올까요?

카레는 있어. 양파랑 감자도 접때 산 거 남았고. 그러니까… 두부 한 모만 사다 줘. 

두부 한 모요. 

응. 

설아는 재깍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슬리퍼에 발을 꿰는 설아의 뒤에 대고 연정이 말했다. 

밖에 추워. 양말이랑 제대로 신고 가.

요 앞인데요 뭐.

그래도.

금방 올게요.

그래.

닫히는 문 뒤로 몇 번 카레, 카레, 중얼거리고 설아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공기가 퍽 찼다. 

검은 비닐봉지를 손목에 걸고 두 주먹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설아는 목을 움츠린 채 걸었다. 집 앞 골목 슈퍼에 <개인 사정으로 당분간 쉽니다>가 붙어 있어서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 사거리 마트까지 다녀오는 참이었다. 보도블록을 세며 걸음을 옮기는데 맞은편에서 고함이 울렸다. 

한설아! 

늦네.

연정은 양파를 채 썰기 시작했다. 천천히 썰다 보니 네 개째가 되었다.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연정은 바닥이 넓은 냄비에 식용유를 두르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였다. 채 썬 양파 한 소쿠리를 냄비에 붓고 나무 주걱으로 저어 주었다. 양파는 금방 숨이 죽었다. 연정은 불을 줄였고 노릇해지다가 진한 갈색으로 졸아들 때까지 양파를 볶았다. 창밖이 어둑했다. 볶던 것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흐무러지고서야 연정은 주걱을 멈췄고, 냄비 가득 물을 붓고 고형 카레 두 조각을 넣었다. 

감자를 안 넣었네.

자기 목소리가 너무 커서 연정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보글보글 끓어서 금세 카레가 걸쭉해졌다. 연정은 밥그릇과 국그릇과 수저를 두 벌 꺼내어 식탁의 양쪽에 가지런히 놓았다. 냉장고에서 오이소박이와 깻잎김치를 꺼내놓고, 가스 밸브를 잠그고,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카레를 푸고 밥통에서 자기 몫의 밥을 덜어냈다. 거실부터 거리까지가 깜깜했다. 국그릇에 담긴 카레의 표면이 엉기고 있었다. 연정은 카레를 먹기 시작했다. 감자도 두부도 들어가지 않은 카레를 떠먹으며 밥을 오래 씹었다. 입 안이 뜨거웠다. 

그릇을 다 비우도록 바깥은 조용했다. 연정은 비운 그릇을 싱크대에 담가 놓았다. 오이소박이와 깻잎김치의 뚜껑을 닫아서 냉장고에 넣고, 쓰지 않은 밥그릇과 국그릇과 수저 한 벌도 도로 찬장에 넣었다. 행주로 식탁을 닦던 연정은 노랗게 물든 자국을 발견했다. 

물이 들었네. 조심했는데.

밝은 색의 나뭇결 위로 동그랗게 남은 노란색을 매만지다, 연정은 무너지듯 주저앉아서 식탁에 이마를 댔다. 서늘했다. 

이래서 다시 안 하려고 했었는데.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겨우 몸을 일으킨 연정은 행주를 집어 들고 물든 식탁을 문지르려다가 그만두었다. 물들 게 무서워서 뭔가를 못해 먹겠다는 말을 들으면 설아는 분명 미간을 찌푸리면서 윗니를 반쯤 내보이면서 웃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아침이 적막했다. 냄비에는 여전히 카레가 가득했다. 숟가락으로 식어빠진 카레를 떠먹으며 연정은 생각했다. 혹시라도 설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경찰에 연락해봐야 하나. 경찰에는 뭐라고 말하지. 

사람이 없어졌다고, 이름은 한설아고 나이는 스무 살이라고. 무슨 관계냐고 물어보겠지? 무슨 관계냐고. 사실 우리는 아무 관계도 아니다. 가족은커녕 가족 비슷한 것도 될 수 없다. 그것은 내게 설아를 걱정하거나 찾을 자격이 없다는 말일까. 또 뭘 물어볼까. 이름이랑 나이 말고 다른 정보는 없느냐고? 어떤 사람, 설아가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냐면. 연정은 상상 속의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웃으면서 자꾸 미간을 찌푸리는 버릇이 있어요, 자기는 잠을 못 자서 커피를 안 먹는데도 설거지가 끝날 즈음 되면 아무렇지 않게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놔 줘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자정이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데 일어나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말소리가 조용조용하고 종종 도망치는 사람처럼 발꿈치를 들고 걷곤 해요, 버섯을 찢어 넣으면 라면이 덜 초라해진다는 걸 알아요, 

같은 말은 설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 애의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라고 되뇌고 연정은 손에 얼굴을 묻었다. 

너 2주 동안 어디서 지냈어. 

설아는 답하지 않았다. 

두부는 왜 산 거야. 교도소라도 갔다 왔어? 

설아는 묵묵히 고개만 저었다. 

네가 미쳤구나, 미쳤어. 

그 다음부터의 말은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입을 꾹 다물고 설아는 생각했다. 세상이 어떤지는 모를지 몰라도, 그동안 알게 된 것이 있다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 

열두 시가 다 돼서 일어나는 사람이야. 오이는 안 먹고 라면을 좋아해. 집에 텔레비전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하다못해 전자레인지도 없어서 커피포트에다 물을 끓여서 맨날 커피를 마셔. 블랙커피를 탈 때는 물을 많이 붓고 믹스커피를 탈 때는 그거의 절반만 부어. 아직도 스마트폰이 없고 오래된 카세트로 음악을 들으면서 책 보는 걸 좋아해. 손이 차고 손톱 발톱은 종잇장처럼 얇고 발등에 핏줄이 파랗게 도드라져 있어. 인상만큼 냉정하지를 못해서 알지도 못하는 여자애를 집에 들여서 먹이고 재우고 보살펴 줘. 인사도 없이 나왔는데, 많이 기다렸을까. 혹시 걱정했을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야 하는데. 미안하다는 말도. 전할 수 있을까, 감히, 전할 수 있을까. 

여기에 없다. 

먼지처럼 두텁게 내려앉은 어둠을 보기 싫어서 연정은 눈을 감고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자기가 벗어 놓은 그대로 널브러진 옷가지와 담가 놓은 그대로 쌓여 있는 설거지 거리가 남루했고 지겨웠다. 이전처럼, 먹어도 딱히 배가 부르지 않고 먹지 않아도 딱히 배가 고프지 않은 날들이 이어졌다. 연정은 늘어지려는 몸을 애써 일으켜서 겨우 가스 밸브를 열고 라면 봉지를 뜯었다. 

나는 부재 속에서 살고 있다. 

연정은 그 문장을 곱씹었다. 단어를 소처럼 되새김질했다. 부재. 연정은 소라와 함께 이 집의 보증금을 마련했다.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공동현관이 열리고 주변 건물들보다 높아서 창밖으로 이웃과 눈이 마주치지 않는 데다 벽지와 바닥이 깨끗하고 무엇보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긴 햇살이 들어와서 만족하며 오래 살았다. 소라와 연정은 같은 과 동기였고 스물한 살부터 줄곧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나란히 사범대를 졸업하고 같은 지역으로 임용 시험을 쳤다. 연정이 한 해 늦었지만 무사히 같은 지역으로 발령을 받은 후로는 줄곧 둘이서 살았다. 어서 가정을 꾸려야지 어쩌자고 아직까지 친구랑 사느냐고 타박을 들으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공식적으로 가족은 아니어도 가족인 셈치고 살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소라가 문을 나서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아무런 인사도 없이. 소라의 동생이 찾아와서 소라의 짐을 들어냈다. 이른 겨울이었다. 

책은 안 가져갈게요. 가져가도 그대로 자리 차지하고 쌓여 있을 거예요. 무겁기만 하고. 

연정에게는 소라 대신 소라의 책만이 남았다. 각자 한 줄씩 자기 책을 꽂아 놓고 반대편부터 읽어보다가, 서로 마음에 드는 책이면 가운데 줄로 옮겨놓던 큰 책장이 남았다. 연정은 차마 책장을 정리할 수 없었다. 책이 아니라 책을 한 권씩 사들이고 옮겨오며 채워가던 시간을 뭉텅 들어내게 될 것 같아서. 한 시절이 통째로 영영 잘려나갈 것 같아서. 

소라는 중학교에서, 연정은 고등학교에서 근무했다. 보통 소라가 일찍 퇴근해서, 이르면 해질녘에, 늦으면 깜깜해져서 돌아오는 연정을 맞아 주는 쪽이었다. 연정이 나 왔어, 라고 말하며 신발을 벗으면 소라가 현관 쪽으로 걸어 나오며 잘 왔어, 라고 대답해주었다. 주말이면 서점이나 작은 영화관에 갔고 방학에는 차 트렁크에 캐리어를 싣고 여행을 갔다. 집에 머무르는 날에는 소파나 식탁에 나란히 앉아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같이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소라는 초겨울부터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면서 성탄절을 기대했다. 이번 겨울엔 눈이 많이 올까 화이트 크리스마스면 좋겠다 올해도 둘이서 조촐하게 파티하자 우리, 라고. 

그 모든 말들이 소용없어졌을 때 연정은 학기중이었고 쉴 수 없었다. 미처 치워지지 않은 소라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갈비뼈 사이사이에 살얼음이 끼는 것 같았지만 양해를 구할 명분이 없었다. 소라의 칫솔. 빨래 바구니 밑바닥에 깔려 있던 속옷과 양말들. 소라가 먹던 오이소박이. 소라가 마시던 루이보스. 동글동글한 필체로 장볼 목록이 적힌 포스트잇.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할 때쯤 방학이 되었다. 연정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자기가 집을 지키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기다리는 시간은 왜 이렇게 긴지, 해는 왜 이렇게 빨리 지고 어둠은 왜 이렇게 무거운지를 자기 몸으로 느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부재를. 

그러다가 찾아왔지. 기다리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볼이 빨갛게 얼고 입술이 하얗게 터서는, 양말도 신지 않은 슬리퍼 바람인 데다 변변한 짐가방도 없는 채로. 크리스마스 장식에 매달린 연말의 흥분도 보신각 종소리에 올라탄 신년의 기대도 가신 일월 중순, 달력이 넘어가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체념이 빈 거리를 메우고 있을 때에. 그렇게 찾아와선, 설아는 이 집에 또 다른 부재를 남겨 놓고 가버린 걸까. 이렇게 훌쩍. 

연정은 알았다. 자기는 설아가 남기고 간 것에도 차마 손대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래서 화장실에는 자기가 쓰지 않는 칫솔이 두 개나 더 꽂혀 있으리라는 것을. 괘씸하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연정은 바랐다. 설아가 자기가 가야 할 곳을 찾아갔기를. 

올해는 윤달이 끼었다고 설이 일렀다. 그것이 도리라고 했기 때문에 설아는 둥그렇게 모여 앉은 사람들 사이에 잡동사니처럼 끼어서 말없이 만두를 빚었다. 만두 판에 시선을 고정하고 생각했다. 연정은 어디에 있을까. 연정도 명절이라서 만두를 빚을까. 귀찮은데 뭣 하러 사서 고생하냐고 말할 사람이지만, 그래도 연정과 만두를 빚는다면 어떨까. 더 명절 같고 즐거울까. 고기는 영 안 먹힌다고 할 테니까 돼지고기나 소고기는 넣지 말고, 으깬 두부랑 잘게 다진 묵은지랑 부추랑 버섯이랑 당면으로 소를 만들어서, 예쁘게 빚어야 아들을 낳는다느니 계집애 솜씨가 그게 뭐냐느니 하는 참견 따위엔 신경 끄고 아무렇게나 만두피를 접는 것이다. 찜통에 들어갔을 때 옆구리가 터지지 않게만 주의하면서. 

사람들은 서로의 근황과 자리에 없는 이들의 안부를 물으며 쉽게 충고하고 타박하고 자랑했다. 누구는 어느 대학, 누구는 어느 회사. 설아의 엄마와 아빠는 아무 문제없는 표정으로 자리에 섞여들었다. 딸이 2G 핸드폰을 압수당하고 맨몸으로 집밖에 내몰려서 2주 동안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지낸 일 따위는 없는 것처럼. 설아는 되도록 소리를 내지 않았고 팔다리를 쭉 뻗거나 크게 휘젓지 않았고 납작해지고 싶어하는 표정으로 벽에 등을 대고 있었다. 이제까지 견딜 만하다고 생각해 온 일이었는데 설아는 이상하게도 점점 숨이 메이는 것 같았다. 왜일까, 새삼스레 왜.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드는데 문득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 눈빛이. 눈빛이. 

설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천장을 잠깐 바라봤다가, 허리를 펴고 천천히 일어섰다. 시선들이 따라왔고 그린 듯한 미소들이 깨졌다. 마임을 하는 배우처럼, 설아는 두 손을 앞치마에 문질러 닦고 밀가루 묻은 앞치마를 벗은 뒤 사람들이 둘러앉은 자리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 집에 대단한 것은 없었다.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생활에 마모된 집이었다. 이불솜은 군데군데 뭉쳐있었고 가구 윗면에는 희부연 먼지가 앉아있었다. 화장실 타일에는 물때가 끼어 있었고 거울에는 양치할 때 튄 치약 거품이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 집에서는 자신의 부피를 견딜 필요가 없었다. 매섭다고 생각했던 눈빛은 끝내 아무것도 아프게 하지 않았었다. 설아는 점점 더 빠르게 걷다가 마침내 계단을 박차고 달렸다. 그 사람에게로 가야 한다, 나는 그곳에 가야 한다, 라고 주문처럼 되뇌면서. 

초인종이 울렸다. 연정은 현관 외시경에 눈을 가져다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설아가 서 있었다.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다시 초인종으로 손을 가져가는 것 같더니, 막상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망설이는 채였다. 연정은 더 지켜보지 못하고 벌컥 문을 열었다. 설아의 눈이 커졌다. 

…죄송해요. 

연정은 말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문 바깥에 서서 설아가 서둘러 말했다. 드물게 목소리가 높았다. 

감사하다고 말하려고 왔어요. 인사도 못 하고 나갔잖아요. 제가, 갑자기 사라져서, 

오늘은 양말 신고 왔네.

네?

연정이 천천히 설아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설아의 온도와 밀도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네가, 들어올 때도 나갈 때도 맨발이었잖아. 그게 너무…

연정이 속삭이듯 혼잣말하듯 느리게 말을 이었다. 둥글게 숙인 등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처음에, 왜 너한테 일단 들어오라고 했는지 알아? 네가 소라를 찾아왔다고 해서도 있지만, 너 발이 너무 눈에 밟혀서 그랬어. 애가 이 한겨울에 양말도 안 신고, 삼선슬리퍼만 신었는데, 얼마나 바깥에 오래 있었는지 발가락이 다 빨개져서… 그런데 네가 나갈 때도 맨발로 나갔잖아. 양말 신고 가라고 했는데 금방이라면서. 그래놓고 오지를 않아서… 혹시나 네가 계속 맨발로 돌아다니고 있는 건 아닌가, 그게 계속 마음이 쓰여서…

설아는 갑자기 코뼈 있는 데가 얼얼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미소 지었다. 고개를 들던 연정이 그 미소를 보고 문득 입을 열었다. 맨 처음 해야 했던 말이 너무 늦게 도착했다고 생각하면서.

잘 왔어. 

…너무 늦었지만, 선생님, 저 두부 사 왔어요. 괜찮으시면… 우리 카레 해 먹어요. 

선생님, 설아가 입을 열었다. 설거지를 하던 연정이 창가에 선 설아를 돌아보았다. 

눈이 오고 있어요. 

고무장갑을 벗고 연정이 창가로 다가갔다. 희부연 하늘 아래로 희끗희끗 싸락눈이 날리고 있었다. 

정말이네. 오긴 오는구나, 눈이. 

그래도 이 정도면 쌓이진 않겠는데, 라고 생각했던 눈은 그치지도 않고 몇 시간을 내리 내렸다. 눈발이 점점 굵어져서 깜깜할 무렵엔 함박눈이 되었다. 연정과 설아는 창과 마주보도록 소파를 돌려 앉았다. 차를 마시다가 설아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옥상 갈까요? 트리 들고. 

웬 트리? 갑자기. 

그냥… 올겨울은 눈이 계속 안 왔잖아요. 트리에 눈 쌓이는 거 보면 뭔가, 잘… 잘 끝나는 기분이 들 것 같아요. 뭐든. 

설아가 트리 꼭지를 받치고 연정이 밑동 부분을 잡고서 현관을 나섰다. 설아는 계단을 뒷걸음질로 오르느라고 걸음이 더뎠고, 덕분에 밑에 있는 연정에게 무게가 쏠려서 고작 한 층 오르는 게 쉽지 않았다. 

나이, 마흔 다 돼서,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이게. 

연정이 헐떡이며 툴툴댔다. 그렇지만 막상 옥상에 올라서 트리를 세워 놓자 웃음이 났다. 둘이 똑같이 허리에 손을 짚고 한숨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정은 처마가 있어서 눈이 덜 들이치는 옥상 문 앞에 붙어서 사락사락 눈을 맞는 트리를 바라보았다. 설아는 옥상 난간에 쌓인 눈을 그러모아 동그랗게 뭉치고 있었다. 조금 큰 눈뭉치 위에 조금 작은 눈뭉치를 올려서 눈사람을 만들고는 뿌듯한 표정으로 연정을 돌아보았다. 그 표정이 웃겨서 연정도 주먹만 한 눈덩이를 두 개 만들었다. 조그만 눈사람 두 개가 나란히 옥상 난간에 올라왔다.

집으로 갖고 갈까요?

가져가서 어쩌게. 

냉동실에 넣어 놓죠. 안 녹게. 

설아의 손이 금방이라도 눈사람들을 들어 올릴 듯했다. 그 손등 위에 연정이 자기 손등을 얹었다. 

냅두자. 원래 눈은 녹는 거야. 

그래도. 아쉽잖아요.

눈이 녹아야 봄이 오지.

봄.

너도 알지. 봄이면 요 앞부터 저기 끝까지 벚꽃길인 거.

알죠. 몇 년을 봤는데. 하얘서 눈 내리는 거 같잖아요.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눈이 벚꽃처럼도 보인다. 

손등이 맞닿은 채로, 내려앉는 눈에 어깨가 희끗희끗해졌다. 위로 향한 연정의 손바닥에 눈송이가 내려와서 작은 물 자국으로 사라졌다. 

벚꽃잎을 잡으면 행운이라던데. 

그러니.

제가 안 녹는 걸로 잡아 드릴게요. 진짜로. 

연정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아래로 당기며, 연정은 웃고 있었다. 봄이라니, 연정은 그 겨울 들어 처음으로 봄에 대해 생각했다. 다가올 계절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내일은 아침을 먹자. 따뜻하게. 

아침을요? 점심이 아니라?

…네가 깨워 줘. 

제가 들어가도 돼요? 

연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닿아 있던 손등을 떼고, 설아는 한 발짝 다가서서 연정과 손깍지를 꼈다. 손이 차가웠다. 차갑지, 겨울이니까, 차갑다면 같이 차갑자, 라고 생각하고 설아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또 올라와요, 옥상. 같이 나와요. 

…그래, 그러자. 

그들은 둘이서 나란히 난간에 기대 있었다. 가로등이 조금 떨어져 있고 차오르기 시작하는 눈썹달도 밝지 않아서, 밤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이 보였다. 허리띠가 선명한 오리온자리가 낮게 걸려 있었다.

어쨌든 드디어 눈이 오네요. 

그러네. 

예쁘네요. 

그러게.

이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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