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사람의 관계학

- 이원하론

※ 이 글에서 인용하는 시는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2020.에서 가져왔다(이하 『제주』). 해당 시집에서 신형철의 평론을 인용한 경우 쪽수만 기재하였다.

「가시리」는 이별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노래한 고려 가요로 널리 읽혀 왔다. 하지만 그 절절한 사랑 노래가 21세기에 이르기까지 그저 아름답게만 읽혀 왔을지는 의문스럽다. 기다림에 대한 동경은 예전 같지 않다. 장정일의 그 유명한 시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그 사랑을 끄고 새로운 사랑을 찾으면 된다. 지금 사랑이라는 이름의 관계는 그 구체적인 내용이 어떻든 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불행만 가득한 극한의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향한 마음을 이어나가는 일이 과거에는 진정한 사랑으로 추앙받았다면, 오늘날 그러한 사랑은 사랑이라기보다 집착, 심하면 질병으로까지 취급된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우리는 기다림 끝에 얻어낸 고양된 사랑을 아름답다고 추켜세우면서도, 정작 그 과정에는 상당한 싫증을 앓는 사람이 되었다. 기다림은 당사자의 행복을 희생하고 지연시키지만, 그게 과연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하는지는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과 ‘기다림’의 의미 변화는 이원하의 시집 『제주』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배경이 된다. 이원하의 화자는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인물로서, 서정 장르가 등장한 이래 반복적으로 출현해왔던 그들과 유사하다. 화자는 오랜 시간 ‘그’에게 사랑 고백도 못 하고, ‘남’에게는 그 사실을 언급조차 하지 못한다. 과거 짝사랑 화자들이 사적인 이유에서 ‘혼자’가 되었다면, 『제주』에서 화자는 사랑의 방식이 남들과 통용되기 힘들다는 공적인 이유에서 ‘혼자’가 된다. 이러한 상황은 ‘단절’보다 ‘고립’에 가까워 보인다.

『제주』가 빚어낸 이 ‘시대적 혼자’가 이원하의 정체성이자, 곧 『제주』를 짝사랑 화자의 사랑 이야기로 환원해선 안 되는 이유이다. 화자에게 사랑의 방식은 관계의 방식, 곧 삶의 방식을 결정지었다. 그러니까 『제주』는 ‘짝사랑’이 아니라 ‘혼자’의 삶이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최종적으로는 ‘관계’를 문제 삼는 시집이다. 즉 이원하는 전통적인 사랑의 주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보다 근본적인 타자와의 관계 문제를 그려냈다. 우리는 『제주』를 읽으면서 이원하가 이 타자 문제에 대해 어떤 시적 사유를 보여주고 있는지 주목할 것이다.

『제주』의 정체성은 그것의 주제나 내용에서 그치지 않는다. 『제주』는 시집의 서사와 맞물려가는 독특한 화법에 상당한 문학적 가치를 지닌 시집이다. 시집을 관통하는 특정 화자, ‘해요체’의 꾸준한 발화에서 암시되는 특정 청자, 그 사이에서 빚어지는 문학적 효과는 무엇보다도 이원하의 개성으로서 마땅히 해명되어야 할 지점이다. 그러한 시적 구성에는 시에서 화자와 독자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나아가 누구에게도 말해질 수 없는 ‘혼자’는 다른 ‘혼자’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시인 이원하의 고민이 선명하게 깃들어 있다. 그래서 『제주』를 ‘화자의 제주살이와 그 속에서의 심경 변화’로 종합하는 해석은 틀리진 않았지만 바람직하지도 않다. 앞에서도 설명했듯 『제주』는 화자의 삶을 그저 말하기보다 그것이 어떻게 독자의 삶과 마주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 시집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원하를 풍부하게 읽기 위해서는 시인이나 화자에게만 집중해왔던 시 읽기의 오랜 관습부터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관습은 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편협하게 만들었던 주 원인이다. 앞서 『제주』를 평론했던 신형철의 경우 이원하가 “감정의 시소를 평형 상태로 유지할 줄 아는 관리 기술”을 얻고 “웃을 수 있어서 웃는 사람이 되었다”는 결론을 얻은 바 있다(156). 하지만 신형철의 비평은 화자의 심리나 태도 변화에 중점을 두면서 두 가지 한계점을 드러냈다. 먼저 신형철은 시집의 다른 타자들에게서도 비롯되는 근본적인 관계 문제를 간과하여 『제주』의 서사를 반대로 파악하고 화자에 대한 잘못된 전망을 낳았다. 또한 그는 『제주』의 목소리를 ‘경어체 화법’으로 협소하게 이해하면서 그것이 보여주는 독자와의 상호작용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본 비평은 신형철이 간과한 두 지점을 극복하면서도 독자를 작품 내부에 들여오는 비평의 모범이 되고자 노력하였다. 미래파 논쟁 이후 지금까지도 한국 비평계에서 특히 그리고 흔히 간과되는 독자의 수용적 측면에 대한 성찰의 시발점에 이 『제주』 비평이 놓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신형철은 그의 평문에서 이원하의 표제작이자 시집을 여는 첫 작품인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이하 「제주」)를 맨 마지막에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원하의 시가 “자연에서 자유로 가는 여정”(128) 중에 쓰였다고 본 그는 여정의 마지막을 「제주」로 장식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주」는 정확히 이원하의 출발점에서 읽혀야 하는 시편이다.

신형철은 「제주」의 위치 설정에 있어 이원하의 ‘웃음’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과거에 이원하는 “표정을 괜찮게 지으면 남에게만 좋은 일이” 생겼고, 그 ‘표정’이란 “겉보기에만 괜찮은 표정”이었다(「서운한 감정은 잠시라도 쉬거나 졸지 않네요」, 이하 「서운한 감정」). 처음엔 “울지 않기 위해” 지어야 했던 이원하의 ‘웃음’이 「제주」에 이르러 “웃을 수 있어서” 나타난다는 게 그의 의견이다(156). 하지만 ‘겉보기에만 괜찮은 표정’을 보고서 괜찮다고 속단해버린 것이 그녀를 스쳐 간 많은 ‘남’들의 실수였다면, 그러한 실수가 그에게서 역시 반복됐을 여지는 다분하다.

나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 「제주」 부분

신형철은 해당 부분을 “마음 이력서의 마지막 줄이자 가장 최근의 증명사진”(156)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력서”와 “증명사진”이 그 사람의 진실을 보여준다는 것은 다소 순진한 발상이다. 그것들은 오히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꾸며진 진실’을 상징하며, 해당 구절은 실제로 그러한 맥락에서 해석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제주」의 반대편에서 화자는 말한다.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혼자 울기 좋은 때다”(「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 이하 「여전히 슬픈 날」). 이원하의 시집에서 ‘혼자’가 곧 ‘울음’의 시간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다. 「제주」와 「여전히 슬픈 날」의 각 인용문은 실제로 종이 한 장의 서로 다른 면에 위치한다. 그야말로 겉모습(앞장)에 숨겨진 내면(뒷장)이다.

화자는 직접 들춰내 봐야 전말이 파악되는 한 장의 종이처럼 입체적이다. 마치 술이 약하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화자에게 “술 한 잔”(「눈물이 구부러지면 나도 구부러져요」)이 생각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즉 「제주」는 우리가 ‘남’으로서 보게 되는 화자의 ‘첫인상’을 시집 첫 면이라는 상징적인 위치에 그려낸 시다. 어쩌면 혹자는 「제주」가 시적 여정의 마지막이라는 신형철의 주장이 아직 가능성의 수준에서만 논박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이원하의 시적 여정을 타자와의 관계 문제로 확장한다면, 그 여정의 마지막 작품은 곧 시집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꿈결에 기초를 둔 물결은 나를 대신해서 웃는다」(이하 「꿈결」)가 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섬’에서 “육지”(「꿈결」)로 넘어가는 화자의 실존적 도약을 목격하게 된다. ‘육지’는 무수한 타자와 부딪히는 불가역과 불확실의 공간이다. 더 큰 미래를 얻고 싶다면 더 무거운 불안을 알고 살아야 한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이원하는 “자유”(157)를 얻은 것도 아니고, 괜찮아진 것도 아니다. 그녀는 다만 ‘결단’하는 존재가 되었을 뿐이다.

이원하의 시에서 가장 쉽게 지적될 수 있는 타자는 바로 ‘그’이다. 화자는 남들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그가 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마음에 없는 말을 찾으려고 허리까지 다녀왔다」). 하지만 화자와 달리 ‘그’는 ‘혼자서도 잘 사는 사람’이고, “혼자서 잘 사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바로 내가 울게 되는 지점”(「나를 받아줄 품은 내 품뿐이라 울기에 시시해요」)이다. 시집 전반에서 화자는 ‘그’를 기다리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때 화자의 ‘꿈’은 그 기다림이 바라는 미래를 함축한다.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

내 할아버지가 맞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광대 근처에, 낯선 구멍 하나

어쩌다 눈이 세 개가 되셨냐고 물으니

내가 보고 싶어 그러셨단다

아프지 않으셨냐고 물으니

나비가 앉았다 날아간 정도라며 웃으신다

내가 눈으로도 마음으로도

억장이 무너지는 듯해

침만 삼키고 있으니

까닭을 알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신다

- 「나비라서 다행이에요」 전문 (이하 「나비」)

“나비가 앉았다 날아간 정도”라는 말은 명백한 반어다. “광대 근처”에 난 “낯선 구멍”의 아픔은 그 정도일 수 없다. 구멍이 생긴 이유가 누군가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 반어에서 우리는 ‘나’를 지키고자 하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읽는다. 화자도 그걸 몰랐을 리 없다. 그래서 “억장”이 무너졌다. 하지만 아픔을 들춰내자니 ‘할아버지’의 노력을 수포로 돌리는 것 같았으리라. 화자는 겨우 “침”만 삼킬 수 있었고, ‘할아버지’는 그런 화자의 속마음을 알아챈다.

신형철은 “화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제목으로나 겨우 얹혀 있다”(135)고 보면서 제목의 내용을 직설적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이 시의 제목도 정확히 반어다. “나비가 앉았다 날아간 정도”라는 반어와 “나비라서 다행”이라는 반어가 서로 짝을 이루면서 대화의 맥을 길어 올린다. 이 맥에는 두 사람의 아픔과 사랑이 섞여 흐르고 있다. 신형철은 두 사람이 ‘웃는 사람’이라 닮았다고 보았지만, ‘웃음’은 증명사진처럼 ‘겉보기’에 불과하다. 두 사람은 ‘아픈 사람’이자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내면’이 닮았다.

「나비」에서는 ‘반어’나 ‘침묵’으로 오가는 대화가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는 진실한 소통으로 귀결되는 현장이 목격된다. 이는 물론 어디까지나 ‘꿈’이며, 곧 ‘현실’의 뒤틀린 알레고리다. 꿈에서 ‘낯선 구멍’으로 구체화 됐던 기다림의 아픔은 현실에선 보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현실에서는 그 아름다운 만남이 성사되지 않는다. 기다림은 계속 연장될 뿐이다.

화자에게 이러한 삶은 앞에서도 말했듯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삶’이다. 이원하의 시에서 ‘남’은 화자의 감정이나 삶을 이해할 수 없는 타자로 묘사된다. 「아무리 기다려도 겨울만 온다」에서 ‘남’은 기성(旣成)의 관계가 하얗게 지워진 “겨울”의 “백지” 위에서도 마음껏 걷고 넘어지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하지만 같은 시에서 화자는 자신을 “거짓말”로 위안해봤자 “봄”이 오는 건 아니라고 말하며 관계에 대한 비관적이고 타율적인 인식을 내비친다. 마찬가지로 화자는 ‘그’를 기다리면서도 정작 기다림이라는 행위에 깊은 회의를 지니고 있다.

섬이 되어버린 입장에서 말하자면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는

동경이 꾀기 때문이다

이리 와서 물결을 보라

물결이 어떤 존재를

쫓는 것처럼 보이는데 잘 보라

존재가 있을 만한 자리에

아무 존재도 없는 것을

- 「동경은 편지조차 할 줄 모르고」 부분 (이하 「동경은」)

물결은

내 근처에 다다라서야

입에 거품을 문다

물결은 그 거품을

다시 겪고 싶지만

돌이키지 못한다

(중략)

섬을 떠나는 일이

뭐가 그리 어려울까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건 너에게만 그런 일이다

- 「바다를 통해 말을 전하면 거품만 전해지겠지」 부분 (이하 「바다를 통해」)

「동경은」에서 “섬”이 “어떤 존재”에게 보내는 “물결”은 「바다를 통해」에서 “섬”으로 오는 “물결”과 방향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 화자는 “섬이 되어버린 입장”에서 ‘그’에게 ‘물결’을 보낸다. 하지만 ‘물결’은 고작 “근처”에 닿을 뿐이고, “거품”조차 돌이키지 못할 정도로 무력하다. ‘물결’의 끝엔 “아무 존재도 없”다. 사실 모든 기다림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 내가 누군가를 기다린다고 했을 때, ‘내가 기다리는 상상의 그’와 ‘나를 기다리게 하는 실재의 그’가 동일하리란 보장은 없다. ‘물결’은 그것이 쫓는 존재와 그것에게 쫓기는 존재 사이에서 끝없이 미끄러지며 산산이 조각난다. 그러니 어떤 ‘거품’도 반복되지 않는다. 「가시리」처럼 가시는 듯 돌아오기란 애초에 불가능하고, 그래서 그런 기다림은 숭고하지만 비극적이다. 그러니 섬을 떠나야 하지만, “섬 밖”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관계의 공간’이고, 그곳으로 “한번 떠나보낸 비밀은 다시 만날 수 없으니 신중해야” 한다(「그늘을 벗어나도 그게 비밀이라면」). 화자에게 ‘섬’은 기다리기에 적합한 곳이라기보다 기다림(사랑)을 숨기기에, 곧 삶을 숨기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원하의 시에서 시적 상황의 핵심은 기다림의 유무가 아니라 남들에게 보일 것이 못 된다는 그 사랑의 성격에 있으며, 그것이 곧 삶의 방식을 만들었다. 그 방식의 차이가 세계와의 불화를 낳은 것이다.

그렇다면 보여줄 수도, 이해될 수도 없는 삶을 이원하는 왜 쓰는 것일까. “경어체 화법”이 “불특정 다수를 향하는 글이 아니라 한 사람만을 향한 말”(150)이라면, 이원하의 그 ‘한 사람’은 당연히 화자의 삶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타자, 곧 독자다. 분명 이원하는 자신과 비슷한 ‘섬사람’들을 의식하며 시를 쓰고 있다. “확실히 이번 가을은 나만 고독한 것 같다”던 화자가 “확실하다는 말은 그다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사용하며 그게 참 상관이 없다”고 말한 이유도 독자들이 경험하는 ‘느낌으로서의 혼자’를 의식한 탓이다(「바다를 통해」). 이원하가 포착한 것은 바로 이 유일한 고독들이다.

발 벗고 나선 해변에

이미 발 벗고 나선 사람의 발자국

발자국은 왜 사람을 따라가지 않았을까요

발자국은 언제까지 제주에서 살 수 있을까요

짙어져가는 걸 거스르면

옅어질까요?

- 「섬은 우산도 없이 내리는 별을 맞고」 부분 (이하 「섬은」)

이원하에게 ‘외출’이란 자신의 아픔을 “섬”처럼 “혼자 회복하는” 과정이다(「동경은」). 그런데 “발 벗고 나선 해변”에 “이미 발 벗고 나선 사람의 발자국”이 있다. 그 ‘발자국’도 ‘혼자’다. ‘발자국’이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물었으니 화자는 그게 “여행자”(「제주」)의 것이 아니라 제주에서 사는 사람의 것임을 알아챘다. 화자는 짙어져가는 것을 거스르면서, 짙어져가는 것을 거슬러 갔던 당신에게 묻는다. 이원하는 당신에게 이런저런 질문들을 건네지만, 그 질문들이 명석한 대답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가스통은 회색이라 아껴야 합니다

속을 알 수 없으니 일단 아껴야 합니다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게 사람을 닮았습니다

닮았다니까 좋은가요?

움직이는 신경초가 얼마나 예민하게요

대답해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 「가만히 있다보니 순해져만 가네요」 부분 (이하 「가만히 있다보니」)

집 안에는

옆 사람이 먼 사람이 될 정도로

챙 넓은 모자가 있을 거예요

그거 외로워서 샀던 건가요

외로우려고 샀던 건가요 아니면

외로움과 상관없이 뭉친 기분 풀려고 샀던 건가요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밤에 보는 꽃이 예쁘고

밤에 가는 오름이 좋다는 건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요

- 「깊은 맛이라는 개념은 얕은 물에만 있는 것 같아요」 부분 (이하 「깊은 맛」)

화자에게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란 ‘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바다를 통해」 등에서 발견되는 이원하의 ‘남’은 실제로 마주치기보다 기억과 경험을 통해서 상정(想定)된 타자들에 가깝다. 그러니 “대답해줄 사람”은 정작 현실에 없다. 그런데 「깊은 맛」에서 내가 방문한 “집”은 ‘남’이 아니라 당신의 것이다. 화자는 “옆 사람이 먼 사람이 될 정도로 챙 넓은 모자”의 구매 이유를 물으면서도 대답은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밤”에 대해 말한다. 그 모자를 쓰는 때가 ‘밤’이라는 것을 화자도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가만히 있다보니」의 ‘무응답’이 증명하는 것은 ‘혼자’인 화자이지만, 「깊은 맛」의 ‘무응답’이 증명하는 것은 ‘하나’가 된 화자이다. 그 ‘하나’란 물음과 대답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야 하는 ‘남’들의 것과는 다르다. 당신과의 관계에서 화자는 그저 자신의 모습을 내보임으로써 우리가 이미 같은 종류의 사람임을 확인시킬 뿐이다. “발자국”(「섬은」) 같은 ‘흔적’이면 우리는 각자의 경험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원하는 겉으로 세계와의 불화를 이야기하면서 속으로는 세계로부터 유리된 존재들과 손을 맞잡는다. 「나비」에서처럼, 일부러 거짓말을 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해도 ‘공명’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있다. 그 공명은 감각의 측면에서도 그러한데, “가로등을 세우기 위해서는/나만 필요했”다든가(「내가 담근 술은 얼마나 독할까요」), “내가 하도 울어서 바다가 생겼다(「누워서 등으로 섬을 만지는 시간」)”는 등 주체와 세계를 왜곡하고 전도시킨 진술들은 타자의 시선에선 거짓이겠지만 본인이 ‘혼자’임을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사실을 뛰어넘은 진실이다. 공명의 불가능에서 발굴한 불가능들의 공명, 이것이 이원하가 보여주는 서정의 지평이다.

이원하에게 공명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이원하의 전부는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 화자를 이해했다고 생각한 독자는, 이해한 그 시점부터 화자의 ‘움직임’을 발견하게 된다. 화자는 ‘이해된 화자’로부터 스스로 이탈한다. ‘내 이야기’가 ‘내(來) 이야기’로 변해가면서 문학과 현실이 서로를 품고 뒤섞인다. 독서 이전과 이후의 독자가 같은 존재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원하의 시에서도 이탈을 준비하는 수상한 진술들이 발견된다.

나요

오랜 미련에 색이 남아 있다면

손바닥으로 전부 문지를 거예요

왜냐하면요

그 미련들은 현재의 나와

함께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문지르다가 손에 색이 옮겨붙으면

새끼손가락만 빼고 다 버릴 거예요

약속은

현재에서도 살아야 되니까요

꿈자리처럼 지켜야 하니까요

- 「입에 담지 못한 손은 꿈에나 담아야 해요」 부분

위 시편은 “나요”부터 수상하다. 원래 1인칭 주어가 문장에서 생략되는 일은 흔하다. 우리는 생략된 자리마다 그 이전의 누군가를 반복해서 기입해왔다. 그런데 괄호 속에서 어두로 호출된 ‘나’는, ‘나’의 반복이 멈췄다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듣는 이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오랜 미련에 색이 남아 있다면/손바닥으로 전부 문지를 거예요”라는 화자의 결심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에 균열을 내겠다는 다짐으로 읽힌다. “미련”은 “오늘도 내 곁에”(「서운한 감정」) 있다던 그것이다. 화자의 ‘미련’은 오래된 것이지만 아직도 바래지 않았다. 화자는 색이 바래기까지 기다리기보다 그것을 직접 지우겠다고 선언한다. 현재의 나와 함께할 수 없는 미련을 붙잡는 일이, 곧 “아무 소용” 없는 “내일”만 “몇 년 째” 지내게 하는 일임을 화자는 알게 됐다(「마시면 마실수록 꺼내지는 건」).

하지만 미련을 지우려면 미련을 문질러야 한다. 어떤 마음을 지우기 위해선 그 마음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듯 말이다. 미련을 지우다 색이 “손”에도 옮겨붙는다면, 화자는 “새끼손가락”만 빼고 다 버리겠다고 선언한다. 이 진술은 화자가 ‘무엇을’ 결의했는가에 대한 중요한 함의를 품고 있다. 화자는 ‘미련’을 버렸지 “약속”을 포기하진 않았다. 『제주』의 시적 여정을 ‘화자의 변화’로만 요약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녀에게는 변한 것만큼이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이 자신의 ‘꿈’에서 ‘미련’을 덜어내자 나타난 ‘약속’이다. 항상 “되돌리려는 마음뿐”(「바다는 아래로 깊고 나는 뒤로 깊다」)이었던 화자는 그 마음을 버리고 “현재에서도 살아야” 할 것들을 묻게 되었다. 이원하는 관계의 대상을 손쉽게 바꾸지도 않고, 망상과 집착으로 관계를 왜곡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여전히 기다리는 사람이다. 다만 갱신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겉모습’만으로 그녀를 ‘웃는 사람’이라 해선 안 된다. 앞으로도 그녀는 ‘울음’과 ‘웃음’ 사이를 오갈 테지만,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그녀의 ‘기다림’이 있다. 그것이 곧 이원하의 ‘의지’다.

온도의 숫자를 하나둘 올리다가

내 손가락이 몇 개나 접혔을 때쯤

손에 불이 날까

불은 모르고 손은 안다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소리는

손바닥에 있다는 사실을

손은 모르고

나는 안다

이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 「나무는 흔들릴 때마다 투명해진다」 부분 (이하 「나무」)

스스로의 의지 속에서 이원하의 기다림은 확실히 어딘가 달라졌다. “손가락”을 접는 행위는 “관심을 얻기 위한 온도”(「나무」)를 올리는 일로 나타나 있지만, 사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시간을 세고 있는 것이다. ‘애타는 마음’이 가열될수록 ‘관심을 얻기 위한 온도’도 높아지니, 둘은 결국 같은 대상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소리”는 “손바닥”에 있었다. 일단 ‘주먹’과 ‘손바닥’의 대조에 주목하자. 손가락을 접으며 시간만 보내는 존재는 결국 주먹을 쥐게 된다. 바로 이 형상이 오랜 기다림이 만들어낸 비밀의 삶이자, “뚫리지 않”은 “터널”이다(「서운한 감정」). 반면 ‘손바닥’은 스스로를 내보이며 무언가를 쥘 가능성에 한껏 열려 있다. ‘손바닥’은 ‘온기’를 주면서도 받으니, 그곳은 화자와 타자의 삶이 교류되는 공간의 상징이다. 그리고 이 손바닥에 뜨거운 “소리”가 있다. ‘소리’는 ‘손바닥’처럼 사방으로 펼쳐지면서 주체를 개방한다. 하지만 ‘손’ 자체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만이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다. ‘나’는 ‘주먹’과 ‘손바닥’의 기로에 서 있다. “당신은 왜 일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서운한 감정」)라며 한탄하던 화자가 어느새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주체로 거듭났다.

이제 ‘섬’에서 쓰인 마지막 기록이다.

섬에는 호수와 숲과 바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입도 존재하고

목도 존재해요

용기가 얹히는 날이면

섬이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요 그

말을 듣기 위해서는 정착이 필요해요

긴 목을 통과하는 속도와

입 모양이 결정하는 소리와

섬 한 바퀴를 도느라 뒤바뀐 내용을

참작하기 위해선 섬에 살아야 하거든요

굳이 이렇게라도 듣고 싶은

한마디는

삼 년간 내 근처에 오지 않았어요 그래도

삼 년간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어요

입과 목이 있는 김에

눈도 달고 태어나지 그랬어요

기다리는 사람 표정이라도 살피시게

고드름도 꿈속에서 물결을 보는 섬인데

네가 나를 보지 못할 줄 몰랐어요

입김 없이는 꿈도 없어요

추우면 추운 쪽에서

먼저 불어야 해요

우리 사이를 메우는 것이

바다라는 생각이 들면

육지로 가야 해요

섬에서 자연 같은 일이

유일하게 이거라면 말이에요

- 「꿈결에 기초를 둔 물결은 나를 대신해서 웃는다」 전문

‘섬’에 존재하는 “호수”, “숲”, “바위”는 시집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했던 자연물들의 제유다. 화자는 “그 누구에게도” “먼저 다가가지 않”는 그것들을 “친구”처럼 여기며 “매일 안심하고” 만났다(「말보단 시간이 많았던 허수아비」). 그러니 나도 그들처럼 먼저 다가서지 않는 “화분에 갇힌 식물”이었다(「하늘에 갇힌 하늘」). 그런데 「꿈결」에 이르러 화자는 ‘섬’에서, 곧 자신에게서 “입”과 “목”을 발견하게 된다. 화자는 “죽은 목숨”(「말보단 시간이 많았던 허수아비」)이 아니었던 것이다.

화자는 ‘섬’의 말을 듣기 위해 “정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긴 목을 통과하는 속도”란 무언가를 고백하기까지 고심하고 인내했던 시간을, “입 모양이 결정하는 소리”는 고백 내내 신중히 선택되고 있는 음성의 구체적 양상을, “섬 한 바퀴를 도느라 뒤바뀐 내용”은 고백의 최종본에서 과거로 거슬러 가면 발견되는 내면의 원본을 뜻한다. 그 모든 것들을 “참작하기 위해선 섬에 살아야” 한다.

‘정착’에 대한 화자의 깨우침은 ‘자기반성’의 산물이다. 화자는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나’에게 되풀이하면서 그것에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결락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전달하려는 무언가가 어떤 말로도 온전히 표현되거나 이해되기가 불가능하다는 문제다. ‘정착’이라는 개념은 그 지점에서 탄생했다. 여기서 화자는 ‘정착’이 일방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섬에 정착할 때, 섬도 나에게 정착한다. 그래서 화자는 ‘내 말’이 아니라 ‘섬의 말’을 듣기 위해 정착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듣고 싶은” 사람이 된 것이다. “삼 년간 내 근처에 오지 않았”던 “한마디”를 단 한 번도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는 말이 사실인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적어도 화자는 그러한 태도로 ‘그’에게 ‘정박’하고자 분투하고 있다.

그런데 ‘입’과 ‘목’이 말하는 데에 필요하다면, ‘눈’은 아무래도 쓰임이 다르다. 대화는 일방적 기다림과 일방적 발화의 결합이 아니다. ‘한마디’를 듣기 위해 ‘정착’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착’을 알아채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기다리는 사람의 표정”이란 신형철이 제출한 개념인 “표현”(145)과 비슷한 것이겠지만, 이원하는 그것을 감지하는 ‘눈’에 대해서도 사유했다. ‘그’가 “달고 태어나지” 못했다고 진술된 ‘시어로서의 눈’은 실제로 달고 태어나는 ‘일상적 눈’과 거리를 형성하며 낯설게 다가온다. 결론적으로 그 ‘눈’이란 타자의 세계가 나의 세계에 의해 여과되지 않고 들어올 수 있는 ‘뚫린 터널’을 의미한다. “네가 나를 보지 못”한 이유도 ‘혼자서도 잘 살아가는 사람’인 ‘그’에게는 화자가 지닌 기다림의 세계를 목격할 ‘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화자는 여전히 ‘기다리는 사람’이지만, 화자의 사유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그리고 ‘보는 사람’으로 뻗어 나갔다. 신형철은 “평형 상태”를 “감정의 시소”에서 찾았는데(156), 그것은 사실 ‘관계의 시소’가 보여주는 평형에서 비롯된 결과에 불과하다.

“고드름도 꿈속에서 물결을” 본다는 말이 이해되려면 우선 그 ‘꿈’이 「나비」의 “꿈”과 유사하다는 점이 지적돼야 하겠다. ‘고드름’의 ‘꿈(ideal)’은 ‘꿈(dream)’ 속에서 ‘물결’로 표현된다. 각자 거리를 두고 맺혀 있는 고드름의 이미지는 바다를 사이에 둔 섬들의 이미지와 유사하다. 그런데 여기서 ‘물결’은 「동경은」의 ‘물결’처럼 ‘쫓는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물결’은 ‘쫓음이 사라진 세계’를 의미한다. 이원하는 정착하는 삶의 극단을, 하나의 물결처럼 서로 섞여 흘러가는 풍경으로 형상화했다. 그런데 ‘고드름’과 ‘물결’은 사실 ‘물’의 서로 다른 모습일 뿐이다. 그래서 “꿈결에 기초를 둔 물결”의 ‘웃음’이 암시하는 그 미래가 현실의 ‘고드름’에도 잠재해 있게 된다.

그렇다면 화자는 어떻게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 ‘겨울’의 찬바람 속에서 피어오르는 “입김”은 사소한 신체 반응에 불과하겠지만, 그것이 명백하게 “꿈”에 선행한다. 무언가 결핍되었거나 과잉되었다는 감각에서 ‘입김’이 생겨나고 그게 모여 ‘꿈’을 만든다. 그리고 ‘입김’을 만드는 것은 ‘추위’다. 화자는 “추운 쪽”이 입김을 기다리는 쪽이기 이전에 입김을 “먼저 불어야” 하는 쪽임을 깨달았다. 따스한 입김으로 ‘고드름’을, ‘겨울섬’을 녹여내는 길목에 서게 됐다.

이원하의 시집이 관계학의 산을 오르는 여정으로 비유된다면, “육지”로 가겠다는 선언에서 독자는 산 정상을 목도하게 된다. “우리 사이를 메우는” “바다”에선 ‘섬’의 ‘물결’이 존재의 근처에서 산산이 부서지며 끊임없이 미끄러져 내린다. 그렇기에 우리는 “육지”에서 만나야 한다. 하지만 ‘섬’ 자체는 ‘육지’로 갈 수 없는 법이다. 육지로 가겠다고 선언하는 시점에서 화자는 ‘섬’이 아니게 된다. 나는 거기에 갈 수도, 살 수도 있다. 화자는 ‘섬’이라는 자신의 상징에서 탈출한다. 화자의 이 ‘움직임’은 그간 쌓아온 상징체계를 뒤흔들며 ‘나=섬’이라는 등식을 폐기한다. 이 대목이 「제주」와 아름다운 대조를 이루며 이원하의 시적 여정을 완성한다.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 「제주」 부분

“김포”는 나의 “도망”이 최종적으로 도착하려는 구체적인 장소라기보다, 육지를 떠나는 기억의 마지막으로서 각인된 제주도의 바깥이다. 나는 ‘어디를 가겠다’가 아니라,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 느낄 뿐이다. 하지만 도망갈 순 없으니 “훔치는 상상”만 했다. 반면 ‘육지’는 대륙을 일컫는 ‘섬사람’의 말이다. ‘육지’라는 시어 하나만으로도 화자가 제주에 살아온 시간이 증언된다. 한껏 슬퍼하고 흔들린 시간 동안 화자의 목적지는 ‘김포’에서 ‘육지’로 거듭났다. ‘김포’는 ‘지명’이지만 ‘육지’는 ‘지평’이다. ‘김포’가 돌아갈 곳이라면 ‘육지’는 나아갈 곳이다. 정착지를 찾아 떠나는 삶이란 필연적으로 모험일 수밖에 없다. 그 모험의 장소가 ‘육지’라는 시어로 명명되었다. 이원하는 미래에 펼쳐질 관계의 세계를 낙관하진 않는다. 다만 “자연 같은 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느꼈을 뿐이다.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제주」)던 화자는 이제 ‘사랑 같은 것’을 위해 타자의 세계 ‘육지’로 나아간다. 미지의 지평에 다가서는 화자의 실존적 도약은, 그렇게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제주』의 시적 여정은 「제주」의 ‘섬’에서 시작해 「꿈결」의 ‘육지’에 이르며 이렇게 막을 내린다.

마지막으로 『제주』의 여정을 담아낸 ‘해요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다수의 시편에서 발견되는 ‘해요체’가 가상의 청자를 상정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신형철에게서 지적되었지만, 그것의 형태적 특징에서 비롯되는 미적 효과는 아직 해명되지 못했다. ‘해요체’ 문장은 발화 목적이 형태적으로는 분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기 고백에 지나지 않았던 『제주』의 문장들이 시집 후반부에 이르면 삶 일반에 대한 전언이기도 한 듯 아리송하게 읽히기 시작한다. 이원하는 분명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노래했지만, 그 음들은 독자의 삶을 조금씩 환기하면서 둘을 마주 서게 했던 것이다. 이는 ‘관계’에 대한 이원하의 주제의식, 그리고 화자의 곡선적인 서사가 ‘해요체’의 형태적 특징과 함께 맞물리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해요체’ 문장을 구사하며 본인만의 서정을 만들어낸 시인들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이를 『제주』만큼 극적으로 활용하며 작품 내부로 독자를 들여놓은 시집은 없었다.

현재 한국 문단에서는 미래파 논쟁을 기점으로 혼성적 목소리가 큰 주목을 받아 시 창작의 주류 기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일한 화자와 목소리로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구축해낸 이원하의 존재는 특이한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오랜 시사(詩史) 속에서 시가 시인의 독백이라는 인식에 일조해왔던 고백적 문체가 독자의 삶을 움직이는 대화로 변모해가는 과정은, 시 비평에서 독자가 차지하는 역할을 우리에게 환기하면서도 때로 그 사실이 너무 쉽게 간과되진 않았는지 성찰하게 한다. 그러니 최근 등장하는 다른 시집들에 비해 비교적 평이하고 단조로워 보이는 『제주』의 이미지와 어법은, 이원하가 독자와 마주 서면서 『제주』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첫 시집일 뿐이다. 『제주』의 집필을 마치고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떠날 계획이었다던 이원하의 인터뷰는 섬에서 육지로 도약해가는 화자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개성적인 목소리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며 큰 관심을 받았던 『제주』의 시인 이원하가 과연 다음 시집에서는 어떤 목소리와 이야기로 많은 이의 가슴을 울릴지 한껏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문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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