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인생이 차라리 어느 한 극단으로 흘러갔다면 삶이 지금보다 훨씬 안온했으리라는 생각에 잠긴다. 아예 나를 둘러싼 그 모든 것에서 눈길을 거두고 공부건 일이건, 어느 하나에 온갖 신경을 꽂아 내리거나. 혹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놀고먹을 궁리만 하고 살았다면. 주어진 현실을 어떤 형태로든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이 인생에 개입할 가능성을 최대한 차단했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이나마 덜 꼬인 인간이 될 수 있었을까. 확실하게 이것을 선택하지도 저것을 선택하지도 못한 나는 결국 우유부단의 대가로 이 집단에서 맡는 책임의 비중이 가장 큰 사람 중 한 명이 되고 말았다. 맡은 자리에 요구되는 책임을 다한다는 명분으로 타인의 문장을 난도질할 때마다 어그러진 울화가 나를 좀먹는다.

은희경은 『새의 선물』에서 삶이 양면적이라고 말했다. 무릇 삶은 기쁨의 무게만큼 고통의 무게를 짊어지는 형태로 굴러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네는 늘 사건의 이면을 직시할 시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면서. 그녀의 문장은 얼마간의 불안을 안고 살아가라는 말과 다름없다. 무언가에 기뻐하되 기쁨에 상응하는 쓰림이 오리라는 걸 견지하는 것. 그런 삶은 피곤하다. 반절 정도 잡힌 끈을 완전히 놓지도, 잡을 수도 없게 해서다. 내 삶은 온통 그런 종류의 모자람으로 가득하다. ‘제대로’라는 부사가 어울리지 않아 모양새가 어정쩡하다. 기사를 교정할 때나 다른 업무를 할 때도 매한가지다. 성의가 없는 건 아닌데, 항상 한끝 모자란 결과가 나온다. 완전히 책임질 자신도 없는 주제에 욕심은 많아서 항상 일은 벌여 놓는다. 단지 누군가는 이 정도 의무와 부담감을 가져야 한다는 얄팍한 부채감으로 매시간을 버티고 있을 뿐이다.

실익 없는 관성에 가깝다. 그런 관성에서 기인하는 애매함. 무언가에 열정을 바짝 쏟을 수도, 시선을 온전히 돌려버리기도 어려운 애매한 열정은 그만큼이나 애매한 결과물을 양산하고 만다. 기사가 제대로 나올 수 있을지, 신문이 제대로 나올 수 있을지 매번 불안해하면서도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좋은 소재가 나타나고 교정 작업이 원활할 때면 기쁘지만 일이 잘 풀리는 만큼 어느 지점에서 또 삐걱거릴 것을 알고 있기에 마음 한구석이 늘 쓰리다. 이렇게 매사에 임하는 태도가 애매한 탓에 신문 발행을 둘러싼 그 어떤 업무에도 온전하게 몸과 마음을 바치지 못한다. 아마 마지막 발행에 이를 때까지도 내가 이곳에 가진 감정의 형상은 비슷할 테다.

그런데도 악을 쓰며 인내하는 이유는 불안감이라는 하방을 만들어두기 위해서다. 내면의 밑바닥에 깔린, 이상한 안전 장치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녀의 말처럼 사람의 생을 구성하는 기쁨과 고통의 추가 평형을 이룬다면, 내가 이곳에서 겪고 있는 고통만큼 내 삶의 어딘가에 기쁨도 존재할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으니까. 부끄럽게도 내게 거창한 사명감은 없다. 기자라는 꿈을 가진 이유도 비슷하다. 삶의 평온함을 얻기 위한 대가로 일정한 양의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고 할 때, 그 직군이 요구하는 일을 따라가면서 버티는 게 그나마 괜찮을 것 같아서였다.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목적도 그 굴레로 들어가기 위해 덩치를 불리려는 것에 있는 만큼, 나는 어떤 식으로건 애매한 크기의 노력을 몇 달이나 기울여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아홉 번의 발행이 남았다. 내 몸부림이 그 정도는 버틸 수 있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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