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영 사회문화부 기자
신재영 사회문화부 기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 시절, 짧은 연극을 만들어보는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연기를 간단히 배우면서, 주어진 상황에 몰입해 대사를 던지거나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로 혼자 말하는 연습을 하곤 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이전에는 연기가 어려운 이유가 낯선 감정임에도 세심하게 표현해야 하는 데서 온다고 생각했는데, 이 수업에서 잠시나마 연기를 배우며 가지게 된 고민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연기가 어려운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색다른 감정을 느껴낼 ‘용기’가 부족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 인물의 감정을 어떻게 실감 나게 연기해낼지가 아니라, 그 인물이 돼 슬픔과 분노를 느끼는 마음이 얼마나 힘들지에 대한 두려움에 망설이게 됐다. 그런데 그 망설임은 연기에서만 나타나지 않았다. 그럭저럭 진행되는 삶의 평지를 걷고 있는 나를 떠나 다른 이의 삶 속의 파도로 뛰어들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이십여 년을 살아오고 있었다. 발밑의 땅만 밟고 눈앞의 길만 보며 걸어온 어리석은 나는,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바다에서 몰아치는 수많은 폭풍을 무시하고 살아온 것이다.

대학 입학 전의 삶을 반성하는 시간을 지나, 대학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요즈음은 나의 꿈을 확신하지 못하고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순간을 마주하고 있다. 어떤 일을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지를 알기가 너무 어려운 나와 달리, “이것저것 하다가 이 일을 하게 돼서, 즐겁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만 한다. 대략적으로나마 목표를 정하고 달려나가는 이들 속에서, 나는 아직 우물쭈물하며 무척이나 느리게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새내기 때 배웠던 연기가 떠올랐다. 어쩌면 나는 그때 얻은 깨달음을 잊고 다른 여러 존재와 상황에 이입하기를 망설이기 때문에 아직도 나의 좁은 마음 안에서만 뒹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관심이 가지 않는다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충분히 들여다보지 않거나,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정서에 적응하지 못할 수 있다는 소심한 편견을 가지고 새로운 활동에 도전하기를 꺼린 날들이 스쳐 갔다. 늘 그랬듯이 ‘나’로서만 편하고 안일하게 살아오면서, 아직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과 사건, 그리고 감정을 견뎌낼 용기를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경험한 ‘이것저것’은 사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세상의 소중한 단면들이다. 삶이 향하는 길을 희미하게라도 꿈꿀 수 있으려면 그 단면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상상할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 그런 준비 없이 내가 아닌 세상의 일에 몰입해 감정을 소모하는 과정을 두려워한다면, 목적지가 나오지 않는 평지만을 걷게 되리라는 생각을 이제야 하게 된다. 더불어, 주변의 여러 사람에게 미안해지기도 한다. 자신의 가치관과 관심사에서 얼마 벗어나지 못하는 내 옆에서 그들이 많이 외로웠을 것 같다. 늘 나의 고민을 들어주었던 어머니가 자신의 고충을 이야기하실 때, 일이 끝나고 돌아온 아버지가 나와 더 대화하고 싶어 하실 때, 내 속에 있는 말을 시원하게 털어놓던 친구가 자신의 속에 있는 말을 꺼냈을 때. 나는 그들에게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를 조금이라도 같이 맞아주었을까. 

여러 가지 반성, 후회, 그리고 미안함이 모여, 잠시나마 기자로 살아보자는 다짐을 하게 됐다. 이십 년이 넘게 살아오는 동안 충분히 몰입해 이해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그리고 그 세상과 더 조화롭게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자는 다짐의 의미로 내린 결정이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그리고 순탄하지만은 않은 여정일 것이라는 생각에 두렵기도 하지만,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발견할 바다를 향한 설렘을 원동력으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 속 주인공의 대사처럼, 모두가 인생에서 한발씩은 늦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에는 편견과 어리석음 때문에 조금 더 늦어지긴 했지만, 살다 보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순간에는 파악하거나 실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기도 하다.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행동이 지나고 나서는 다르게 보이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그 대사를 향한 믿음이 더욱 강해졌다. 그러니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의심하며 괴로워하지 말고, 조금 늦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미래에 얻을 깨달음을 기대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싶다. 늦게라도 발휘하는 용기로, 넓은 바다의 파도를 맞으면서.

늘 이렇다니까. 꼭 한발씩 늦어. 

- 영화 〈걸어도 걸어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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