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형 교수(조선해양공학과)
이신형 교수(조선해양공학과)

나처럼 게으른 사람이 좋아하는 취미 중 하나는 상상이다. 2092년의 승리호까지 나아가진 않더라도 상상을 하다 보면 재미도 있고 기분도 좋아진다. 몇 년 전부터 해오던 상상 하나를 풀어놓을까 한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얘기부터 시작한다. 2호선은 시내를 양방향으로 순환하며 연 3백만 명 이상의 승객을 실어 나른다. 20여 개 수도권 전철 노선의 핵심이다. 순환선은 지하철의 원조인 런던에서도, 가까운 일본에서도, 중국 베이징에서도 도시 교통의 핵심이다. 끊임없이 사람과 물건이 오가는 도시에서 그 이점이 증명된 것이다.

나는 바다에도 2호선 열차 같은 순환 선박이 끊임없이 돌고 도는 순환선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하철역에서 내리면 버스나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것처럼, 순환선의 역 역할을 하는 기착지에는 그 주위로 정기적인 운송 수단이 준비되면 좋겠다. 이때 운송 수단은 선박, 헬리콥터, 수륙양용 자동차, 드론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화물이 자체 동력을 갖고 하늘을 날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순환선이 생기면 물류에 혁명적인 역할을 했던 컨테이너 화물 운송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다. 컨테이너가 더는 멍텅구리 철제 박스가 아니라 기착지에서 바로 도착지까지 날아가는, 또는 바다 위를 달리다가 땅 위를 달려가는 수송 장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전 지구적 규모의 순환선이 너무 크다면, 권역을 나누면 된다. 지하철 같은 선로도 필요 없으니, 수요지와 공급지 위치를 맞춰 운용하면 된다. 기착지는 꼭 육지에 있을 필요도 없고 차라리 먼 바다에 떠 있는 게 유리할 수 있다.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잠깐씩 순환 선박이 멈췄다가 가는 기착지에서 순환 선박은 스키장 곤돌라처럼 잠깐 속도를 줄여서 운항하기만 해도 된다. 기착지는 작은 해상도시 같은 모양이 될 것이다. 화물을 싣고 내릴 뿐 아니라, 순환 선박의 유지 및 보수를 담당하기도 하며, 최소한의 인력으로 운용되고 재생에너지로 에너지를 공급할 뿐 아니라 담수와 기본적인 식량은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천재지변 수준의 외란에도 대처 가능하도록 일부는 수중으로 대피하고, 일부는 자급자족 시스템으로 버틸 수 있게 한다. 가상 물리 시스템을 기반으로 모든 기능은 원격 운영되며, 다른 기착지 및 모든 선박들과 실시간으로 연결될 것이다.

기착지가 사람이 많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선박에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적용될 것이다. 선박의 연료는 원자력 에너지가 기반이 될 것이다. 선박용으로 개발된 소규모 모듈형 원자로를 통해 선박은 40년 동안 연료 보충 없이 순환선을 쉼 없이 운항할 수 있다. 원자로를 싣고 다니는 선박을 민간인 선원들은 기피하지 않을까? 이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디지털 트윈을 이용한 자율 운항 기술로 선원 없이 운행되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사고가 나도 먼바다에서 일어날 일이므로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다.

선박의 개념 설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스크류 프로펠러는 탄생 이래, 그 압도적인 효율로 다른 종류의 추진기를 모두 밀어냈다. 하지만 원자력 에너지를 이용한다면, 저렴하게 끊임없이 생산되는 전기를 이용한 전기 추진 방식이 쓰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효율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전혀 새로운 추진기가 프로펠러를 밀어내고 득세할 수 있다. 저속에서 조종 성능이 떨어지는 선미타도 폐기될 가능성이 있다. 선박을 세우거나 저속에서 미세 조종이 필요할 때도 훨씬 효율적인 방법이 나올 것이다. 선박의 주기관과 추진기가 달라진다면, 화물의 적재와 하역 방법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올 것이고, 당연히 선형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선체의 구조적 측면에서도 불필요한 부분은 자연스럽게 제거되고, 선박을 짓는 재료와 건조 방식에도 엄청난 변화가 생길 것이다. 

이런 시스템이 구축되면 자원·에너지와 제조, 그리고 소비로 이어지는 흐름에도 변화가 올 것이다. 자원·에너지가 빠르고 싸게 배달되면서, 현지 소비자의 요구에 맞춘 제품이 신속히 개발되고 생산될 것이다. 내게 딱 맞는 물건을 원하고 소비하기 때문에, 모두가 판에 박힌 비슷한 생활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미 모 자동차 그룹은 이런 맞춤형 현지 생산 모빌리티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시대’는 이런 날을 더욱 앞당길 뿐이다.

정년퇴임까지 이제 12년 남았다. 얼마나 현실이 될지 모르지만 상상은 계속하려 한다.

 

이신형 교수(조선해양공학과)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