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분(일본연구소 객원연구원)
이경분(일본연구소 객원연구원)

안익태는 국제적인 스케일로 ‘친일’했다. 안익태가 일본제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명백한 증거는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을 위해 1942년 9월 18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연주회다. 이 연주회를 위해 〈만주국 축전곡〉을 작곡했고, 직접 지휘했으니 연주회의 성공 여부가 안익태에게 달린 셈이었다. 안익태를 ‘일본 지휘자’로 유명하게 만든 것도 바로 이 연주회였다. 이 행사가 1942년 9월의 독일 주간 뉴스에 소개되면서 일본 지휘자로서의 안익태는 독일의 선전 매체에도 등장하게 됐다.

안익태의 친일문제는 애국가 교체 논란으로 자주 매체를 달궜지만, 정작 안익태가 어떻게 독일의 고위 간부, 재독 일본대사, 일본군부 고위층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휘를 할 수 있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시원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기본적으로 ‘조센진’을 삐딱하게 바라봤던 시절, 일본인이 아닌 안익태가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일본제국을 대표하는 지휘자로 나설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안익태가 만주국 건국 10주년 연주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지도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슈트라우스는 나치 독일을 대표하는 최고 작곡가이자 나치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와 밀고 당기며 자신의 이득을 추구했던 노련한 음악가였다. 슈트라우스는 일본제국의 황기 2600년 기념을 위해 1940년 〈일본축전곡〉을 작곡해 천황에게 헌정했다. 그런데 동양인으로서 이 곡을 유럽에서 처음 지휘한 사람은 일본인이 아닌 안익태였다. 

더 흥미로운 것은 슈트라우스의 태도였다. 안익태가 〈일본축전곡〉을 1942년 3월 빈에서 지휘했을 때, 음악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눈치챌 수 있는 큰 실수를 했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슈트라우스는 이에 개의치 않고 안익태를 지휘자로 인정하며 박수를 보냈다.

안익태는 슈트라우스의 전기에 등장하는 유일한 한국 음악가다. 슈트라우스와 안익태가 교환한 편지도 남아있다. 안익태가 독일 대가와 가까워지는 데 삼국동맹이라는 정치적 배경이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안익태는 ‘일본 지휘자’의 역할에서 음악가로 성공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찾아냈다. 조국 대신 받은 일본 여권은 안익태의 ‘평생 소원’인 독일 무대에 설 수 있는 귀한 입장권이었다. 일본 유학 후 곧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안익태는 오로지 음악에 몰두했다.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 안익태처럼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겠다는 큰 포부를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한인들은 아무 대가 없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미국인 기독교도들의 도움도 더해져 유럽으로 건너갈 수 있었던 안익태는 부다페스트에서 유일한 한인 유학생으로 성공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고, 삼국동맹이 결성되지 않았다면, 〈만주국 축전곡〉을 지휘하는 일본 지휘자 안익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태평양전쟁 전후로 한반도의 한국 지식인 엘리트들은 거의 모두 친일로 돌아섰고, 친일이 대세였던 때, 일본의 선전대로 일본제국은 ‘해가 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안익태도 유럽에서 일본제국의 파워를 온몸으로 절감했다. 가진 것 없고, 의지할 곳 없이 어려운 조건에서 자신이 뜻하는 바를 이루는 방법은 세계적 수준에서 뛰어나거나, 권력의 흐름을 잘 파악해 처신하는 것이다. 안익태는 후자에 재능이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콧대 높은 일본제국의 관료와 군부가 안익태를 ‘일본 지휘자’로 활동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까지 ‘조센진’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안익태에게는 이런 모든 제약을 뛰어넘을 묘책과 간 큰 배짱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제국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독일의 심장부에 도달한 안익태의 묘책은 무엇이었을까. 독일제국의 음악 권력 슈트라우스였을까. 하지만 음악적으로 미숙했던 안익태가 이해타산에 능숙한 대가 슈트라우스에게 도달할 수 있었던 묘책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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