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교수(뇌인지학과)
이상훈 교수(뇌인지학과)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은 사고이고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은 사건이다.”(신형철, 2018) ‘개를 문 사람’에 견줄 바 아니지만 작은 ‘사건’이 발생했다. 언제부턴가 셔틀버스가 ‘공무수행’ 대신 ‘Intellectual Pioneer’라는 이름표를 달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난 이 새 이름표가 불편했다. ‘지적 모험가만이 타야 한다’라고, ‘너 지적 모험가 맞냐’라고 따져 묻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지적 모험가가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고민했고, 이 시평은 그 고민의 요약이다. 

뇌인지과학자인 내게도 신화와 문학은 유용하다. 특정 시대와 상황에서 펼쳐지는 인간 ‘마음의 역사’(허수경, 1992)를 엿볼 수 있으니. 거대한 암벽산을 등진 채 태양을 반사하는 핫셉수트의 장제전에서, 로마 하드리아누스의 판테온 로툰다의 눈에서 쏟아지는 햇빛기둥에서는 우리를 압도하는 힘이 느껴진다. (조은환/이찬, 2016). 문명의 온도가 낮았던(레비 슈트라우스, 1955) 고대 인류에게 이 힘은 더 강력했을 것이며, 안으로는 무력감과 공포를 밖으로는 저편의 낯선 존재에 대한 신비와 경외를 일으켜 인류의 마음에 신화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리스 신화와 아테네 비극에는 지적 모험의 태도에 관한 중요한 단서가 있다. 

그리스 중의 그리스(천병희, 2008), 아테네. 디오니소스 축제 비극 경연대회 13회 우승에 빛나는 아이스퀼로스. 그의 비극에서, 제우스의 힘과 폭력으로 암벽에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고문과 협박에도 인류에 지혜의 씨앗을 전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이스퀼로스는 우리의 문제 해결을 위해 권력자의 선처에 기댈 것이 아니라 기술과 지혜로 우리들만의 진지를 구축(박정대, 2011)하는 모험을 해야 한다고 정치하기도 한다. 분노와 복수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아트레우스 집안의 복수극 대신, 아테나는 법정에서 피고의 행위를 심판하자는 낯선 제안을 한다. 이 비극 ‘자비의 여신’에서 아이스퀼로스는 또 한 번 정치를 시도한다: 사적인 분노와 복수가 아닌 “무정부도 아니고 독재의 노예도 되지 않는” 법정의 정의가 우리를 절망에 가두지 않고 희망의 미래를 열 것임을. 그리고 복수심에 씩씩대는 여신들에게 ‘자비의 여신’이란 새 이름으로 새 사회를 향한 실험을 함께 하자고 한다. 그동안 분노와 응징으로 짓눌리던 인류의 마음에 혁명 같은 태도 변화(누스바움, 2016)가 찾아온 것이다. 

길 위에 문명 경쟁의 역사가 흐른다면, 그 길 위를 걷는 인류의 마음에는 태도 간의 경쟁이 벌어진다. (젤딘, 1994)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에서는 ‘익숙한 절망과 도피를 부르는 공포’와 ‘새롭고 낯선 희망과 모험을 부르는 호기심’이 경쟁한다. 공포 상황에 놓인 우리 뇌에는 공포 회로뿐만 아니라 흥분과 보상의 회로가 활성화된다. 이는 그 공포의 원인이 학습되고 그래서 예측 가능할 때만 그렇다. 이 뇌인지과학의 발견은 아테나의 ‘너그러움’이 프로메테우스의 ‘지혜’와 결합될 때 공포 속에서도 ‘모험을 떠날 수 있는 용기’라고 할 만한 뇌 상태가 연출됨을 시사한다. 너그러움과 연민이 지적 모험을 위한 태도라는 주장은 너무 이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이지 않을까? 본능에 가까워 보이는 ‘공포’와 ‘분노’에 버틸 만큼 우리에게 ‘너그러움’의 능력이 있을까? 최근의 행동신경과학 연구들은 그렇다고 증언한다. 18개월 된 아이들도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며 낯선 아이에게 장난감을 나누며 ‘너그러워’질 수 있으며, 48시간 간격으로 피를 섭취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흡혈박쥐들도 친족 관계가 아니지만 신뢰가 형성된 다른 박쥐들과 피를 나누어 마실 능력이 있다고 한다.

새로운 생각과 낯선 타인을 환대하는 너그러움과 연민(젤딘, 1994)을 품고 스스로를 담금질해 지적 진지를 구축하면 호기심과 용기가 우리의 마음에 깃들 것이다. 그렇게 지적 모험을 떠나보면 어떨까? 이 모험에서 우리는 새로운 발견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조금은 덜 불편한 마음으로 셔틀버스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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