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현 사회문화부장
이소현 사회문화부장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의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는 40년을 목수로 일했다. 하지만 심장병에 걸려 생업에 종사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다. 하지만 수치화된 그의 심장병 심각도는 고작 12점에 불과하다. 15점은 받아야 질병 수당을 신청할 수 있다는 안내원의 말에 다니엘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구직 수당을 신청하려 한다. 그마저도 모든 절차가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탓에, 컴퓨터보다 종이에 훨씬 익숙한 나이인 그는 또다시 좌절에 부딪힌다. 구직 수당을 신청한 다음에도 주 35시간 이상을 구직에 전념했다는 물적 증거를 완벽히 갖춰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는 되려 수당 제재 대상으로 올라간다.

안내원은 증거를 요구한다. 구직 활동에 전념했다는 증거를 대 보라는 말에 다니엘이 내밀 수 있는 것은 도서관 예약증뿐이다. 돈이 없어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운 두 아이의 엄마 케이티에게 손수 가구를 만들어주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이력서를 돌린 다니엘의 노력은 단지 증명이 안 된다는 이유로 소각된다. 욕지거리를 달고 살면서도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는 그에게 세상이 내리는 판결은 가혹하다. “부족해요. 이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이동진 평론가가 말하길 켄 로치의 영화는 과대평가된 감이 많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의 영화는 소위 ‘예술’이라고 불리는 작품과 거리감이 있다.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로 영국의 노동자 계층이다. 감독이 구현하는 서사는 힘겨운 삶을 인내하는 노동자들에게 바치는 헌사에 해당한다. 어떤 면에서든 화려한 기교는 없다. 영화 기법적인 면에서나, 서사적인 면에서나 신선하고 아름답다고 평가할 만한 요소는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를 밀도 높게 감상하는 ‘시네필’(Cinephile) 중에서는 이 감독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정치적 성향을 앞세워 노동자 계급과의 연대를 외치고, 영국을 포함해 부패한 사회 체계를 안고 살아가는 사회를 비판하는 등 시의적절한 척 상만 타 가는 거품 낀 감독이라는 말과 함께. 혹은 지루하다는 평가를 내리거나.

나는 최근의 논객들에게 예술다운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한 기준을 앞세워 우리가 뿌리를 딛고 있는 세계에 대한 방관과 조소를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느낀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건조한 현실을 스크린이나 화폭에, 혹은 글에 담아내면 이에 진부하다는 낙인을 찍거나 정치적 색채가 돋보인다는 명분으로 밀어내며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냉소적인 시선이 존재한다. 물론 그 사람들의 잘못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 눈 뜨고 세상을 직시하다 보면 온통 부조리하고 보기 싫은 것만 시야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를 회피하고 싶은 마음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개인의 취향과는 별개로 그런 전제가 내면에 깔리는 상황은 다소 위험하다. 자신의 현실과 맞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고백하려는 사람들의 노력 자체를 간과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켄 로치의 작품을 좋아하고, 그가 거장으로 대우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은 엉망인 복지 체계 속에서도, 혈흔이 난무하는 전장 속에서도 ‘생존자’들이 여전히 그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음을 화면 너머로 알려준다. 현란한 영상 기법이나 스토리를 보여주지 않더라도, 그런 종류의 고백적 진술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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