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공간 속에 마련한 고독한 창작의 자리

 

▲ © 최정민 기자


“춘천까지 먼 길 오려면 고생할 텐데요.” 며칠 후 서울에 오겠다는 오정희씨의 말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굳이 춘천으로 향한다. 작가가 스스로 자신의 문학적 태생지라고 말하는 곳에서 직접 대면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사람들은 춘천의 안개와 눈꽃, 도시를 둘러싼 물의 아름다움이나 아련한 분위기만을 말하지만, 나는 그 아름다움이 숨기는 것, 품고 있는 것, 그 이면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습니다.”
‘나의 문학과 생활’, 토지문화관 강연 중

지난 6월, 독일어로 번역된 중편 소설 『새(Vogel)』가 독일의 리베라투르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이 작품에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아이들이 받게 되는 상처와 불안, 절망이 내면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그는 “한 때 초등학교 상담교사 자원봉사를 하면서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을 느껴 쓴 소설”이라고 말한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68년, 단편 「완구점 여인」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한 그는 79년 「저녁의 게임」으로 이상문학상, 82년 「동경」으로 동인문학상, 이 외에도 동서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의 소설은 주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억눌린 여성의식과 본질적인 여성 생명력을 복잡하면서도 완벽한 구도, 시적인 문체 속에서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첫 단편집 『불의 강』(1977)을 비롯한 그의 초기작들은 숙명적인 삶에서 심연을 본 주인공들의 절망감으로 인해 다소 어두운 색채를 띤다. “제 초기 작품은 정상적인 틀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생활이나 정신적 신체적 장애자들, 뒤틀린 성(性)의 이미지들이 등장해 광기와 파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 젊은 날의 참혹한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죠.”

“소설은 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스스로 답해가는 것”이라는 그에게 글쓰기는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고통스러운 노력이었던 셈이다.

그의 작품세계에 큰 변화의 계기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결혼이었다. “아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니 상처와 아픔으로 기억되는 어린 시절을 비로소 따뜻한 시선으로 보게 되더군요.” 황폐한 유년의 시간 속에서 삶의 불가해한 그늘에 눈을 뜨는 어린 소녀의 얘기를 다룬 「유년의 뜰」은 이런 시각에서 나온 것이다.

가정과 문학이 조화롭게 양립할 수 있었냐는 물음에 그는 동년배 작가 최명희의 『혼불』을 읽고 마음 아팠던 경험담을 담담히 들려준다. “모든 것을 버리고 문학에 순교한 그가 사실 참 부러웠어요. 하루는 숙제를 안한 아들을 한바탕 꾸짖고 허탈한 마음에 거울을 보는데 내가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내 선택에 후회는 없어요.”

그는 “창작이 요구하는 공간과 일상적 삶이 요구하는 공간이 부딪치는 자리에 나의 글쓰기가 자리잡고 있다”고 했다. 가족들과 맞닥뜨리는 생활공간에서 자신만의 창작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으론 색다른 동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는 딸의 어릴 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동화 『송이야, 문을 열면 아침이란다』(1993)를 “가장 행복한 작업이었다”고 회상한다.

그의 작품 중에는 장편이 없다. 『불의 강』 이후 『유년의 뜰』(1981), 『바람의 넋』(1986), 『불망비』(1987), 『야회』(1990)까지 그의 창작집의 작품은 모두 단편. 『새』 또한 150쪽 정도의 중편이다. “장편? 써야죠. 이제는 서사성도 중요하게 생각되더라고요. 하지만 단편이 갖는 밀도나 중량감은 장편에서 드러내기 힘들겠죠.” 앞으로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묻는 작품을 쓰고 싶다는 오정희. 우리 문학의 한 봉우리를 이루는 중견 작가임에 틀림 없지만 그는 요즘 신작을 몇 년째 못 내고 있다는 자의식에 고민한다.

하지만 침묵 뒤에 나온 그의 작품이 빛을 발할 것을 믿는다.긴 어둠 뒤에 만나는 빛이 항상 눈부시듯. 추분이 가까워 온 요즘 부쩍 길어진 밤을 느끼며 아침을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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