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석(자연대 교수ㆍ생명과학부)

인간은 세균, 바이러스와 같은 병원체로부터 끊임없이 도전을 받고 있지만, 인체는 면역이라는 방어체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 세균은 주로 인체 내에서도 혈액, 점막과 같은 세포외부 환경에서 생활하는 반면, 바이러스는 세포내부로 침투하여 그곳에서 생활하고 증식한다. 생활근거지가 세포외부인지 혹은 내부인지에 관한 것은 단순한 이분법적 분류의 의미를 뛰어넘어 의학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세포외부에 존재하는 세균들에 비해 세포내부로 침투하는 바이러스는 면역시스템이나 항생제 같은 약물에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치료제 개발 여지의 폭이 좁다.

물론 면역시스템은 세포내부에 숨어있는 바이러스도 찾아내 공격할 수 있도록 진화해왔다. 숙주세포 속에 숨어있는 바이러스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감염된 세포를 직접적으로 파괴하는 면역반응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는 MHC 단백질도 함께 제시하게 되는데, 이와 같이 제시된 항원은 세포독성 T cell (CTL)이라는 백혈구에 의하여 인식돼 살해당하게 된다. 이 반응 결과 특정한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는 세포들이 파괴됨으로써 그 속에서 증식 중인 바이러스도 제거된다. 그러나 바이러스들도 면역시스템을 방해할 수 있는 면역회피 전략을 진화시켜 왔다. 세포는 바이러스의 생활 근거지이기 때문에, 바이러스는 숙주세포를 파괴하지 않고 가능한 한 오랫동안 숨어 지내는 전략을 구사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창과 방패의 관계처럼 바이러스와 면역시스템은 끊임없이 서로를 극복하기 위한 생존게임을 벌이고 있다. 미시적 관점에서 생존게임에서 패한 바이러스와 인간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며, 거시적으로는 환경과 감염성 인자에 대해 유전적으로 저항력이 강한 개체군들의 선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면역시스템보다 한 단계 앞선 바이러스의 다양한 면역회피 전략 때문에 바이러스 퇴치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인의 90%가 만성 감염되어 있는 헤르페스 바이러스의  주요 면역회피 전략은 신경세포 속에 숨어 지내는 것이다. 신경세포는 면역세포가 공격할 수 없는 면책특권지대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이 건강할 때는 숨어 있다가 과도한 스트레스ㆍ음주ㆍ피로 등으로 인해 면역력이 약화되면 일시적으로 활동하며, 면역력이 회복될 즈음 우리에게는 입술주위에 포진과 여러 가지 합병증세를 남겨놓고 다시 신경세포 속으로 숨어든다. 감기를 유발하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주기적으로 자신의 외부형태를 약간씩 변장하여 침입함으로써 면역시스템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는 위장전략을 사용한다. AIDS 바이러스, 각종 종양관련 바이러스, 간염바이러스 등도 이와 유사한 그러나 때로는 독특한 면역회피 전략을 갖추고 있다. 산업화와 더불어 최근 감염이 증가되고 있는 결핵균은 세포속으로 침입한 다음 방어막을 치고 세포의 방어시스템에 저항한다.

현재 몇몇 급성감염 바이러스에 대한 예방용 백신이 개발되어 있지만 일단 만성감염을 확립한 바이러스와 세균들에 대해서는 치료책이 없는 실정이다. 과학자들은 세포 속에 숨어있는 만성감염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하여 ‘치료용 백신’의 개발을 설계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바이러스와 면역시스템간의 생존게임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암, 자가면역병을 비롯한 대부분 난치성 인체질환의 40%가 직ㆍ간접적으로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것이며 (한 예로 간암의 70%가 B형 간염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것임) 이에 대한 천문학적인 의료적, 사회적 치료비용을 고려할 때 효율적인 항바이러스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은 암의 정복과 더불어 인류가 고민하고 함께 도전해볼 만한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