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서적 번역의 문제점 진단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베르겔리우스, 리비우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서양 인문학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이라는 것, 그리고 아직 국내에 원전 번역이 단 한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나마 희랍어 고전 번역은 최근 들어 전공자들에 의해 조금씩 진행되고 있지만 라틴어 번역은 거의 전무한 상태다. 번역서의 부족은 현대철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후설의 『논리연구』, 하이데거의 『시간개념의 역사서론』 등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서적들이 아직 완역되지 않고 있다.

이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을 비롯해 책임 주석이 첨부된 주요 고전들의 원전 번역본이 두 세 판본씩 출간돼 있고, 하이데거 전담번역가만 열 명 이상 존재하는 일본의 경우와 크게 대조된다.

국내 라틴어 번역은 전무한 상태
이웃 일본의 상황과 대조돼


번역서 자체가 부족할 뿐 아니라 양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 번역서의 질에 대한 문제제기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올해 2월 영미문학협회는 영미고전작품 36권을 선정, 광복 이후부터 2003년까지 국내에서 완역된 562종의 판본을 분석해 번역의 완성도를 검토한 결과를 발표했다. 검토된 562종 중 추천본으로 선정된 책이 62권에 그친 결과는 고전문학번역의 척박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밖에 메를로-퐁티, 데리다 등의 철학 번역서에 대한 오역논란도 전공자들에 의해 줄곧 제기되고 있다.

양질의 번역서가 부족한 원인으로는 ▲번역의 전문성에 대한 낮은 평가  ▲번역작업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  ▲번역에 대한 제도적 지원 장치 부족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상업성이 떨어지는 학술서적의 경우, 내용의 전문성과 출판자체의 어려움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전공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는 대학의 획일적 연구업적 평가는 고전, 학술서적 번역을 위축시키는 원인 중 하나다. 현재 대학에서 시행하는 연구업적 평가에서 역서는 상대적으로 논문에 비해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번역은 창조물이 아니므로 논문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인식이다.

그러나 인문ㆍ사회과학 등 기초학문 분야의 학술서적이나 고전 문학작품을 비롯한 특정분야 서적의 번역은 논문작성보다 훨씬 큰 노동 강도를 요구하기도 한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번역작업을 논문과 비슷하거나 더 낮은 비중으로 평가하는 것은 전공자들의 번역작업에 대한 의욕을 저하시킬 우려가 있다. 한영혜 교수(국제대학원ㆍ국제학과)는 “일본의 경우 다양한 업적을 평가기준으로 삼는데 비해 우리나라는 논문을 가장 중요시 하는 경향이 있다”며 “연구 업적을 평가할 때 전공의 특수성을 좀 더 세밀하게 고려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또 낮은 번역료도 전공자들이 번역을 기피하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현재 번역료는 인세의 경우 권 당 5~6%, 매절 방식으로는 매당 3천~4천원가량 지급된다. 일반적으로 최소 6개월에서 1년 이상 소요되는 작업기간에 비해 돌아오는 보수는 턱없이 적은 것이다. 한 출판 관계자는 “십여년전의 원고료가 매당 2천5백원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지금의 번역료는 매우 낮은 수준이다”고 언급했다. 

번역작업에 대한
제도적 지원, 인식 전환 이뤄져야


한편 번역에 대한 지원사업은 한국학술진흥재단, 대산문화재단 등의 주도로 시행되고 있으나 혜택의 범위가 아직은 충분하지 못하다. 1998년부터 실시되고 있는 학술진흥재단의 ‘동서양학술명저사업’은 대표적 번역지원 사업으로, 번역되지 않은 고전작품을 선정해 매당 7천원~1만2천원 정도의 번역료를 지원해왔으며 선정방식의 객관성, 철저한 중간 검증 등으로 국내 학술서적의 번역 수준 향상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번역대상서적이 고전에 국한돼 현대서적 번역은 지원이 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현실은 근본적으로 학술서적 출판 풍토와 깊이 연관돼 있다. 데리다의 『법의 힘』 등을 번역한  진태원씨(철학과 강사)는 “상업적으로 이윤을 남기기 힘든 학술서적의 출판에는 대학출판부, 정부의 적극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미국의 경우 대학출판부가 학술서적 출판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미네소타 대학 출판부가 80년대 초부터 이십여년 간 발행한 『문학의 역사와 이론』 총서가 들뢰즈, 데리다 등 대륙사상가들을 소개함으로써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도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그 대표적 예다.

그러나 한 대학출판부 관계자는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열악한 재정상황에 처해 있는 한국의 대학 출판부에 선진국처럼 주도적 학술서적 출판을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혀 정부의 체계적 지원 확대가 시급함을 시사했다.

 권다희 기자 dawn27@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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