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노동자들의 애국가

「직공들의 반란」, 「농민전쟁」 등의 작품을 남긴 독일의 판화가 캐테 콜비츠(Kathe Kollwitz)는 1922년 5월 1일의 일기를 이렇게 남겼다. “음악대가 인터내셔널가와 마르세예즈를 연주했다.(중략)투쟁을 즐겁고 성대한 축제기분이 나도록 만드는 훌륭한 장면이었다. 5월 1일은 여전히 축제의 날이라기보다는 투쟁의 날이라고 해야 맞다. 그러면서도 물론 축제의 날이다. 국제적인 세계축제의 날!”

‘인터내셔널가(인터가)의 시작은 1871년 프랑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1831년 이후 프랑스 노동자 봉기, 독일 의인동맹 결성(1936년), 영국 차티즘 운동(1839년) 등이 일궈낸 노동자의 정치적 성장은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1871년 3월 인터내셔널 파리 지부는 파리 시민 및 노동자 다수와 연대해, 프러시아 군에게 파리를 내준 정부를 대신하는 노동계급의 독자정부 ‘파리 꼬뮌’을 형성한다. 그러나 그 해 5월 프랑스 정부군은 파리를 공격했고, ‘파리 꼬뮌’은 설립 72일 만에 정부군에게 패배했다. 인터가는 당시 ‘파리 꼬뮌’의 한 자치구 위원장이었던 유진 포티에르(Eugene Pottier)가 쓴 가사에 피에르 디게이테(Pierre Degeyter)가 1888년 곡을 붙여 만들어졌다. 이후 인터가는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 개사돼 퍼져나갔으며 1917년 소비에트 혁명 이후 1943년까지 구소련의 국가로 채택되기도 했다.

한국에서 처음 불리던 인터가는 ‘굶주림과 추위 속에 우린 울었다…’로 시작했다. 그러나 ‘지울 수 없는 노래', ‘기차에 대하여’ 등을 쓴 김정환 시인이 이를 새롭게 번안하고 같은 해 메아리가 ‘메아리 9집’에 이를 실으면서, 인터가는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 던져라…’로 시작하는 현재의 노래가 됐다.

김 시인은 “글쎄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아. 그 때는 문승현씨(‘그날이 오면’ 작사ㆍ곡)가 만든 노래모임 ‘새벽’과 함께 민중가요를 워낙 많이 만들었거든. ‘바르샤비앙카’ 같이 사회주의권에서 유명한 노래들을 번안해 불렀는데 ‘인터내셔널가도 그 중 하나였어”라며 회상했다. 당시 메아리에서 활동했던 김병오 교수(전주대 영상예술학부)는 “김정환씨는 그때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의 주축이었는데 가끔씩 메아리 공연 콘티를 봐주기도 했죠. 대학로에서 인터가를 공연했을 때 ‘대학 노래패의 노래책에 공산당 찬가가 실렸다’는 식의 기사가 조선일보에 났었던 게 기억나네요”라며 술회하기도 했다.

인터가는 전세계적으로 노동자와 진보적 운동가들에게 널리 불려왔다. 그러나 인터가는 ‘민들레처럼’, ‘단결투쟁가' 등의 노동가요나 ‘구속동지 구출가', ‘파업가' 등의 전술가요에 비해 한국 노동자 정서에 잘 맞지 않았다.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도 인식의 변화는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노총 홍보선전본부의 한 관계자는 “인터가는 현학적인 노래예요. 노동자 사이에서는 ‘학출(학생운동출신)의 노러라고 부르기도 하죠. 집회 현장에서는 짧은 시간 안에 배울 수 있는, 쉬운 노래가 필요해요. 2003년 메이데이 집회에서 인터가 제창을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였어요”라며 인터가의 한계를 피력한다. 노동문화 활동가 이은진씨(전 ‘꽃다지’ 대표)도 “2003년 유럽에 갔을 때 참여한 영국, 프랑스, 독일의 반전집회에서는 꼭 인터가를 부르게 되더라구요. 각기 자신의 언어로 노래를 해도 서로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죠. 그렇지만 우리 노동자 스스로가 국제 연대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아서인지 인터가를 보급하고 부르기가 쉽지 않네요”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편 인터가는 영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36년 스페인 내전 당시 민중의 투쟁과 갈등을 그려낸 「Land and Freedom」(1995년 깐느 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 수상작)은 주인공들이 전우를 땅에 묻을 때 인터가를 내보낸다. 또한 「실미도」에서 684부대원들이 최후를 맞는 장면에서 부르던 노래 역시 인터가다.

노동자 계급의 지속적 연대의식 고취를 위해 만들어졌던 인터내셔널가. 그러나 국내에서는 노동자와 괴리돼버린 ‘학출의 노러가 됐다. 「자유의 무늬」의 저자 고종석씨는 ‘대학 시절 술이 약간 들어가면 인터가를 허밍으로 읊조렸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읊조리는 인터가를 언제쯤 쉽게 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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