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취임한 이용훈 대법원장의 취임사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그는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사법부는 인권보장의 최후 보루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다”며 “사법부가 행한 법의 선언에 오류가 없었는지, 외부 영향으로 정의가 왜곡되지는 않았는지 돌이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의 불신과 불만이 팽배한 상황에서 취임한 사법부 수장의 고뇌가 엿보였다.

하지만 사법부의 다른 구성원들이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9월초 대법원은 전라북도 의회가 제정한 학교급식조례가 WTO 협정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무효라고 판결했다. 물론 법리해석만을 놓고 본다면 크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WTO 협정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지니고,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는 그 하위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은 다른 나라들과의 형평성을 제기하며 대법원의 결정에 대해 우려와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다.

며칠 전에 있었던 대법원 판결은 국민을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대법원은 17대 총선 선거운동기간 전에 주민 모임에 참석해 유인물을 낭독하고 서명한 혐의로 2심에서 벌금 150만원을 선고받았던 조승수 의원에 대한 원심을 확정했다. 반면, 지역구민에게 250만원 가량의 선물을 돌린 혐의 등으로 2심에서 벌금 800만원을 선고받은 한 의원과 2000년 의약 분업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2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모 의원 사건은 원심을 깨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자세한 법리해석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 하지만 ‘돈은 묶고 말은 푸는’ 공직선거법의 입법 취지에서 볼 때 대법원의 판결은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우리처럼 사법부, 특히 대법원이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나라는 드물 것이다.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는 미국의 연방 대법원은 9명의 대법관들이 수천의 안건 가운데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되는 사건 150여개 정도만 심리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대법원은 12명의 대법관이 한 해 2만여건을 처리한다. 일은 엄청나게 많이 하면서도 국민의 불신을 받는다니 한편으로는 딱하기도 하다. 하지만 일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는 없다.

전임 최종영 대법원장은 퇴임하면서 사법부의 독립을 강조하였다. 물론 사법부의 독립이 민주주의의 운영원리인 견제와 균형을 위해 중요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에서 벗어난 오늘날 사법부의 독립을 강조하기보다는 국민들의 건전한 상식에 맞는 판결이 우선돼야 하지 않을까. 아직도 공공연하게 전관예우라는 형식으로 계속되는잘못된 관행과 들쭉날쭉한 양형 사례를 보면서 국민들이 사법부를 신뢰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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