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안의 비주류

영원한 비주류’ 김근태의 인생은 엄밀히 말해 언제나 비주류였던 동시에 주류였다고 할 수 있다. 김근태는 1947년 소사(지금의 부천)에서 태어난 이후 국민학교 교장이었던 부친의 전근 때문에 평택과 양평에서 네 곳의 국민학교를 옮겨가며 다녀야 했다. 그는 “몸살을 앓는 듯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 정도로 낯선 학교에서 텃세에 시달리는 이방인의 처지였지만, 동시에 교장의 아들이라는 일종의 특권층이기도 했다.


광신중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한 김근태는 동기들의 대다수였던 경기중학교 출신들에게 설움을 받아야 했다. 가난했던 김근태는 65년의 서울대 상대 진학으로 한국사회의 주류로 편입되는 듯 했다. 하지만 67년에 대통령 부정선거 규탄시위로 제적을 당하고 군대에 끌려가야 했고, 복학한 이후에도 69년의 3선 개헌 반대, 71년의 교련 데모 등에 가담했다가 남은 대학 시절을 도피생활로 보내야 했다. 학교에도 나오지 못하던 그가 대학 졸업장이나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상대 학장이었던 변형윤 선생이 반 억지로 ‘밀어준’ 덕분이다. 그는 ‘KS 출신’이라는 정통 주류의 길을 걸어왔으면서도 정작 그 속에서 철저한 비주류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대학 입학 이후 그가 복권돼 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되는 95년까지의 약 30년의 인생은 쉼 없는 투쟁과 고난의 시간이었다. 70년대 내내 민청학련 사건과 긴급조치 위반으로 도피생활을 하며 인천지역에서 노동자 교육 등을 하던 그는 83년 최초의 공개적 사회운동단체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해 초대, 2대 의장을 맡으면서 재야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때문에 85년에는 악명 높은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게 지옥 같은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김근태가 재야라는 비주류의 집단 내에서 주류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은 87년 대선에서 표명한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이 재야의 넓은 지지를 얻었을 때다. 이후로도 그는 재야와 야권의 통합을 주장했고 92년 대선에서 ‘국민회의’ 집행위원장으로서 김대중 후보를 지원했으며, 마침내 95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비주류의 주류가 주류의 비주류로 옮겨가는 순간이었다.


정계 입문 후 8년 내내 그는 비주류 자리를 벗어나기는커녕 ‘양심선언’으로 정치권에서 ‘왕따’를 당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원칙을 쉽게 꺾지 않는 고집스런 김근태가 재야에서는 주류로, 정치권에서는 비주류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은 한국 정치 현실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제는 비중있는 정치인으로 부상한 김근태가 애초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주류가 될 만큼 정치판이 변화할지, 아니면 그가 변심해 주류의 길을 추구할지는 앞으로 좀 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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