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전통적 남성성의 해체와 변화하는 남성성

오늘날 자녀를 돌보고 살림하는 남성, 패션과 미용에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남성들의 모습을 여러 매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회의 젠더 구조가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에 따라 매체에 등장하는 남성의 모습과 이것이 우리에게 받아들여지는 방식도 달라진다. 『대학신문』은 근대부터 현대까지 한국의 남성성은 어떻게 형성됐고,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에 대해 짚어봤다.

 

남성성,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란=남성성(Masculinity)은 다층적인 개념으로, 대응하는 개념인 여성성과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19세기 페미니즘이 등장하면서 근대적인 젠더 관계가 변화되기 시작했고, 규범과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던 여성성은 다양한 여성의 개인성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전환됐다. 배은경 교수(사회학과)는 “19세기에 페미니즘이 나오기까지, 좋은 남자는 곧 좋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남성성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라며 “남성성이 연구 주제로 등장한 것은 보편적 기준으로서의 남성성이 깨진 것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남성성을 파악하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는 남성 사회 내에서의 위계를 살펴보는 것이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사회학자 래윈 코넬이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다양한 남성성 중에서도 권력을 가지고 있는 유형을 칭한다. 최태섭 문화평론가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남성 일반에게 제약으로 작용한다”라며 “‘남자는 ~해야 한다’라는 것들을 요구받고, 이를 달성하지 못하면 ‘남자답지 못하다’라는 낙인이나 주변부로 밀려나는 상황을 감수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해양경찰청 양성평등위원회 강남식 위원장은 “가부장제 구조 하에서 남성의 역할을 규정하는 맨박스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라며 “서열화돼 있는 폭력 문화와 위계적인 병영 문화가 대표적”이라고 밝혔다.

◇가부장적 남성성=가부장제라는 사회 구조의 관점에서 남성성을 파악할 수도 있다. 배은경 교수는 “고전적인 가부장제 하에서는 남성 간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해 자신의 식솔을 보호하는 것이 핵심이 되며, 여자와 남자는 경쟁을 하거나 적대 관계에 들어가지 않는다”라고 설명한다. 여성이 전통적인 성 역할에 머물 때, 남성이 이들을 돌보고 보호하는 ‘온정적 가부장주의’도 있다. 배은경 교수는 “온정적 가부장주의자는 여성의 세계와 남성의 세계를 처음부터 분리해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여자는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라며 “그들의 신사적인 태도는 여성 뒤에 존재하는 남성을 존중하는 것이거나 모성에 대한 예찬에서 비롯된다”라고 말한다. 그는 “내 여자와 남의 여자를 구분하는 태도, 여성을 이성애적인 대상으로만 보는 태도 등이 이에 해당한다”라고 덧붙였다.

간혹 헤게모니적 남성성과 가부장적 남성성이 연관돼있기에, 두 개념이 혼재돼 사용되기도 한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김대현 운영위원은 “헤게모니적 남성성과 가부장적 남성성 모두 ‘제도적 남성성’이라는 같은 범주에서 파악된다”라고 설명한다. 반면, 두 개념은 명확히 분리된다는 견해도 있다. 여성연구소 홍찬숙 연구원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꼭 가부장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가부장적 남성성 역시 남편이 아내와의 수평적 위치에서 가지는 권력일 수도 있고, 한국처럼 부계 사회를 기반으로 한 남성성일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한국에서의 전통적 남성성은 헤게모니적 남성성과 가부장적 남성성이 결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전통적 남성성의 해체

◇한국의 전통적 남성성 해체=기존의 남성성을 유지하던 관습이나 사회 조건이 바뀌게 되면서, 이상화되는 남성성 이미지 또한 바뀌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의 전통적 남성성 해체는 1997년 외환위기가 기점이 됐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경제 위기로 인해 생계 부양자였던 아버지가 실업자가 되면서, 가부장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태섭 문화평론가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아버지가 육아 등을 통해 가정 내에 자리 잡아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다”라고 주장한다. 배은경 교수 역시 “외환위기로 인해 여성이 노동 시장에 참여하고 자신의 경력을 추구하게 되면서 노동 시장에서의 가부장적 보호가 깨졌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외환위기보다 이른 시기부터 한국의 전통적 남성성의 해체가 시작됐다는 견해도 있다. 한국 사회의 산업화가 성공하게 된 때가 전통적 남성성이 변화하게 된 시점이라는 것이다. 홍찬숙 연구원 “산업화가 성공하고 외부 세계와 교류가 많아지면서, 이때 태어난 X세대의 사고방식에 변화가 있었다”라며 “이들은 직장 문화에 반발하는 개인주의적 행태를 보이거나 돌발적인 행동을 하곤 했다”라고 말했다. 이런 1990년대의 전통적 남성성의 변화 지표를 한국 여성운동의 궤적을 통해 발견할 수도 있다. 김대현 위원은 “20세기 말 ‘한국여성의전화’와 한국성폭력상담소가 공론화한 가정폭력·성폭력은 이전의 제도적 남성성에서는 ‘사적인 관계의 일’이나 남성이 으레 구사할 수 있는 폭력으로 여겨졌다”라며 “이를 젠더 기반 폭력이라 명명하게 됐다는 것 자체가 가부장적 남성성에 일정한 압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변화하는 남성성의 다양한 모습=사회 변화 속에서 더 이상 남성은 ‘남자는 ~해야 한다’와 같은 명제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 2019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발간된 보고서에 따르면, 20~30대 남성들은 △경쟁과 성공 △위계와 복종 △성적 능력과 물리적 힘 △감정절제로 대표되는 전통적 남성성에 동의하는 비율이 낮았다. 이들은 이전까지 ‘여성적’이라고 분류돼왔던 분야에 대해 수용도가 높고, 타인종·성소수자 등의 약자에게도 관심을 기울인다는 특징을 보인다. 

한편으로는 이전의 전통적 남성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하이브리드 남성성’이 나타난다는 담론도 있다. 평화페미니즘연구소 김엘리 소장은 젠더 규범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자아와 이성애 젠더 규범에 통과해 남자로 승인받는 실재적 자아 사이에서 남성성이 분열한다고 본다. 김엘리 소장 “20~30대 남성들에게서는 탈(脫)성별분업의 생각이 강하게 나타나지만, 이것이 반드시 성평등으로 향하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라며 “아버지 세대의 이상적인 남성상과 거리를 두지만, 그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한다”라고 말했다.

전통적 남성성이 해체되며 현대에 나타난 남성성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패션과 외모에 큰 관심을 가지는 ‘메트로 섹슈얼’을 그 예시로 들 수 있다. 김엘리 소장은 “미디어에 마초적이지 않은 남성 연예인과 아이돌이 나오고 이런 문화 속에서 성장한 20대 초반 남성들은 눈썹을 다듬거나 비비크림을 바르는 등, 자신의 몸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만드는 것이 자연스럽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20대 후반 혹은 30대 남성은 외모 가꾸기를 부정적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이를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특성을 보인다. 김엘리 소장은 “외모 가꾸기가 주류의 특성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남자다움’은 얼굴이 살짝 까맣고 우락부락한 것이라는 생각이 약화된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전했다.

 

한국 사회와 변화하는 남성의 삶

◇남성성 규범에 변화가 있었나=하지만 전통적 남성성의 해체 속에서 규범으로서의 남성성이 다중화됐는지는 미지수다. 배은경 교수는 “여성성 규범이 다층적이고 복합적이게 되면서 더는 ‘화장하는 것이 여성 억압적인가’에 대해 답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라며 “반면 외환위기 이후 좋은 성인 남성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규범으로서의 남성성에 관한 논의에는 변화가 없었다”라고 역설했다. 최태섭 평론가 역시 “근대적 남성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모색하는 시도가 많지 않고, 회사 위주의 인간으로서의 남성성이 계속되고 있다”라며 “실제로 게임 산업 정도를 제외하면 현 20대 남성을 타깃으로 할 수 있는 사업들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만큼 현 20대 남성들이 정체성 측면에서 비활성화돼있고 파악이 어렵다”라고 밝혔다.

이에 현재의 사회 구조가 다양한 남성성의 모색을 어렵게 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홍찬숙 연구원은 “청년 남성은 기성세대의 남성관을 완전히 거부하기 어렵고 이와 어느 정도 타협함과 동시에, 같은 시대를 사는 여성을 만났을 때 자신이 생각하는 남성성을 보여줘야만 한다”라며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남성관이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러울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현재의 가부장적 남성성에 대해 반감을 품으면서도 대안적 남성성에 대한 대책이 부재하니, 세대·계층·젠더의 중첩적인 갈등이 풀리지 못하고 젠더 갈등으로 비화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한국사회에서 ‘루저문화’의 등장과 남성성의 재구성」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의 ‘루저문화’는 아버지처럼 살지 못하는 사회적 상황에서 자신을 자학하며 유머화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배은경 교수는 “루저문화에 관한 논문이 나온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 루저문화는 자학을 넘어 타인을 향한 공격으로 바뀌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밝혔다. 강남식 위원장은 “해외의 경우 외국인 노동자를 향한 반감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주 경쟁 대상인 여성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전했다.

◇지금 남성성 탐구에 필요한 것은=이에 각자의 남성성을 자유로이 탐구할 수 있는 자원이 제공돼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배은경 교수는 “이제는 남녀가 힘을 합쳐야 집을 가지고 가정생활을 할 수 있는 시대”라며 “성별에 상관없이 최소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정도의 소득 마련이 가능한 청년 노동 시장을 만들어가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사회경제적 자원과 함께 문화적·심리적 자원도 마련돼야 한다. 홍찬숙 연구원은 “20대 남성에게 필요한 것은 성 대결 의식이 맞는 것이라고 인정하거나 단순한 경제적 지원을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현실과 유리되지 않는 대안적 남성성을 실험할 기회와 자유·문화를 허용해야 한다”라고 언급한다. 또한 그는 “기성세대는 집단주의에 기반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현세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들의 사고방식을 인정해야만 남성성이 확장될 수 있다”라고 피력한다.

하지만, 남성성 범주를 확장하고 대안적 남성성을 발견하려는 시도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남성성이 갖는 다층성이다. 코넬의 『남성성/들』 논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과 ‘대안적 남성성’의 관계를 쉽게 양자택일할 수 있는 선택지처럼 설명한 점에서 비판받기도 한다. 김대현 위원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구조는 매우 강고하고 아직도 그 영향력에 새로 입증될 부분이 많기에, 대안적 남성성 논의의 내실은 가부장적 남성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얼마나 깊게 가지고 있느냐로 판가름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그는 덧붙여 “현재의 남성 혹은 여성은 사회 구조로서 가부장적 남성성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해악을 인식하는 것과 본인 스스로가 사회 구조의 가해자로 지목되는 것을 혼동하고 있다”라며 “구조와 개인은 서로 다르기에, 젠더 구조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의 성적 수행이 그것과 구별된다는 것을 파악하기만 하면 된다”라고 전했다.

 

각자가 처한 상황,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상적인 남성성은 달라질 수 있다. 전통적 남성성과 상반되는 남성성 역시 획일적인 것으로 규정돼서는 안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이분법적인 성별로 구획되지 않고, 남성성·여성성을 넘어선 ‘인간성’의 담론이 논의될 수 있는 사회를 기대한다.

 

삽화: 김윤영 기자

kooki1026@snu.ac.kr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