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서평 | 갈등에서 협력으로: 인간 본성을 파헤치다

오늘날의 사회는 집단 간의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돼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 간의 갈등도 사회 집단을 등에 업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과연 이런 갈등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인지 질문하기에 앞서,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은 무엇일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본성을 자연스럽게 발현하는,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일까? 학자들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한없이 복잡한 특성을 지닌 인간 본성에 관해 질문을 던져왔다. 『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은 인간진화생물학자의 관점에서 인간이 ‘한없이 사악’하면서도 ‘더없이 관대’한 이중적인 본성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휴먼카인드』 역시 인간은 복잡한 존재임을 전제하며, 인간의 본성은 그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결정됨을 역설한다. 『대학신문』은 오늘날까지 진행되고 있는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를 갈등의 원인을 중심으로 바라보며, 이런 논의가 인류의 미래에 시사하는 바를 알아보고자 한다.

 

공격성이 만들어낸 인간 본성의 모순과 이중성

집단에 소속된 인간은 이중적인 면모를 지닌다. 개인은 집단 내에서는 관대하지만, 집단 간의 갈등에서는 더없이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에서 저자 리처드 랭엄은 인간 본성이 항상 악하거나 항상 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면, 본성의 ‘악’이 드러나는 원인과 방법에 주목한다. 그는 인간 본성에 내포된 공격성을 ‘반응적 공격’과 ‘주도적 공격’으로 구분한다. 반응적 공격은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공격이고, 주도적 공격은 계획적이고 목표지향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공격이다. 두 가지의 공격은 서로 다른 신경회로에 의해 제어되며 상이한 생물학적 토대를 지니고, 독립적으로 진화한다. 인간은 오랜 시간을 거쳐 반응적 공격성이 낮고 주도적 공격성이 높은 존재로 진화했다. 낮은 반응적 공격성은 사회적 관용으로, 높은 주도적 공격성은 치명적인 공격으로 연결된다.

랭엄은 이런 진화의 이유를 ‘자기 길들이기’라 설명한다. 인간이 주로 길들인 존재는 가축이다. 길들여진 모든 종은 야생 상태보다 몸과 뇌의 크기가 작고, 얼굴이 짧으며 암수 차이가 줄어든다. 또한 길들여진 종은 유순해지며 반응적 공격이 줄어든다. 가축을 길들이는 과정에서 공격적인 개체에 대한 배제와 살육을 통해 더욱 유순한 암수 개체들의 교배, 즉 인위적인 개입에 의한 선택이 일어난 결과다. 호모 사피엔스에게도 이와 같은 길들이기 증후군이 나타났다. 무거웠던 인류의 몸은 작아지며 가벼워졌고, 얼굴의 크기가 작아지고 돌출이 줄어들었으며 뇌의 크기 역시 점점 줄어들었다. 인류는 어떻게 자기 자신을 길들여왔을까? 저자는 오랜 시간 동안 규범을 파괴하거나 과도한 공격성을 보인 인간들을 제거해온 사형 제도가 ‘자기 길들이기’라는 진화의 방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길들여짐의 결과로 생긴 협력과 학습 능력을 바탕으로, 인류는 네안데르탈인 등 다른 종과의 경쟁에서 승리해 평화를 누렸다.

사형 제도를 통해 선택된 주도적 공격성은 두려움에 의한 ‘도덕성’을 만들어냈다. 인류는 규범을 파괴하거나 공격적인 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언어로 모의했고, 연합을 꾀했다. 계획적이고 주도적인 연합을 통한 주도적 공격성의 발현은 전쟁과 학살, 약탈과 숙청을 발생시켰고, 이는 사회적인 처벌로 작용했다. 이런 요소들이 시민사회의 기반이 되며 인간은 자신이 처단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바탕으로 집단의 규범에 순응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도덕성’이 형성됐는데, 이에 저자는 도덕적 원칙의 존재에 관해 의문을 제기한다. 결국 사람들은 도덕적 원칙에 의한 영향을 받는다기보다, 비판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편견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도덕적’으로 진화해왔지만, 보상과 상황에 따라 주도적 공격성을 바탕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미덕과 폭력이라는 두 가지 모순적인 요소가 인간 본성 내에 양립하게 된다고 설명할 수 있다. 모순적인 도덕성은 오랜 기간에 걸친 진화의 과정에서 형성돼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조직적 폭력 대신 협력의 추구로 나아가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신뢰: 협력과 연대의 열쇠

한편 『휴먼카인드』의 저자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는 자유로웠지만 사회 계약을 맺으며 타락했다는 인간 본성에 관한 장 자크 루소의 주장을 지지한다. 자연 상태, 즉 과거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인간의 본성이 인간과 문명이 공존하게 되며 문제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본성과 문명은 본질적으로 조화될 수 없다며, 본성에 관한 새로우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인간 본성의 부정적 면모는 대부분 후천적 교육에 의한 결과기에, 저자는 그런 교육의 근거가 되는 연구와 실험들을 전면적으로 비판한다. 소년들이 섬에 갇혀 지내며 생기는 무질서 속에서 인간 내면의 ‘악’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다룬 소설 『파리 대왕』과 달리, 작중 배경과 비슷한 시기에 ‘아타 섬’이라는 태평양의 무인도에 고립됐던 소년들은 화합을 통해 구조되기 전까지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는 실증적인 사례를 통해 인간 본성에 관한 통념을 반박하는 식이다. 

저자는 전쟁과 같은 위기 속에서 인류는 선한 본성을 바탕으로 사회를 조직해 나갔다고 주장한다. 『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에서는 협력을 주도적 공격성의 결과라고 설명하지만, 『휴먼카인드』는 이를 ‘우호성’으로 바라본다. 우호적인 본성을 바탕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상호협력을 쌓아온 호모 사피엔스는 타인과의 모방을 통한 사회적 학습능력으로 서로 협력하고 모방해 공동학습을 가능하게 하며 생존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다만 저자가 인간의 본성이 무조건적으로 선한 방향으로 발현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언론에 보도되는 각종 극단적인 사건들은 우리로 하여금 타인이 자신의 이기심만을 좇아 행동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저자는 이렇게 형성돼온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프레임이 인간의 내재적 동기를 억제하고, 부정적인 믿음을 양산하며 인간의 본성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한다.

인간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연대와 협력을 이뤄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현재 인류가 빠져 있는 불평등, 혐오와 불신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례를 바탕으로 한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인식은 내재적 동기의 확립으로 발전하고, 이는 우리가 스스로 ‘옳다’라고 생각하는 일에 참여하고 불의에 저항하며 대의를 위해 행동할 수 있는 의무의 실현으로 이어진다. 결국, 역사적 사례를 재조명하며 얻은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인간 본성을 신뢰했을 때, 인류는 ‘인간다움’을 발현하며 협력하고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증오를 품고 갈등하는 존재’라는 믿음에서 벗어나, 인간이 선하게 태어났다는 용기 있는 믿음을 바탕으로 선한 본성을 이끌어 낼 때라는 것이 저자의 의견이다.

 

다면적 이해를 통한 ‘인간다움’의 발현으로

철학에 기반한 기존의 논의들은 대부분 인간의 본성을 이분법적인 분류에 편입시키고자 했다. 근대 서양에서는 독립성과 자족성으로 인해 자연 상태의 인간은 도덕적으로 평등했다고 주장한 장 자크 루소와 이기심과 욕심을 강조한 토마스 홉스가 인간 본성에 관해 대립적인 논의를 펼쳤다. 고대 동양의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며 인간의 본성은 선하나, 현실에는 선하지 않음이 있기에 인간은 본성이 오염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순자는 사람은 남의 행복을 시기하는 대신 자기의 이익만을 챙기려고 하는 본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스승의 교화와 인위적인 학습을 통해 예의 법도를 따르며 본성을 교정하는 후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와 달리 두 책은 공통적으로 이분법적 분류에 집중하기보다 인간 본성이 복합적인 특성을 가진다고 전제한다. 『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공격성에 주목하고, 『휴먼카인드』는 역사 속 협력의 사례들을 조명한다.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특징에 대한 정의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바람직한 ‘인간다움’을 실현해나갈 것이냐의 문제다. 맹자와 순자는 비록 서로 다른 언어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주장을 펼쳤지만, 결국 이들의 주장은 인간은 수양을 통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노력의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을 이해하려는 시도들은 인간이 과거에 이어 현재, 그리고 미래에 자신을 ‘길들여나가는’ 과정에서 생각해야 할 바람직한 방향이 무엇인지에 관한 논의로 연결된다. 『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은 ‘길들임’의 과정을 통해 공격성의 변화를 유도하고 협력을 추구하며 인간 사회의 보편성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휴먼카인드』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바에 따라 인간 본성이 결정되기에 연대와 협력의 힘을 믿어 보자고 말하고 있다. 인류 탄생 이래 끊임없이 반복돼온 갈등은 사람들을 지치게 했고, 인간 본성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양한 사회 집단이 등장해 갈등하고, 과거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윤리적 문제가 불거지는 사회에서도 인간이 자신의 관점을 바탕으로 ‘도덕성’을 인식하고 정의해나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성선 대 성악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성의 다양한 이면을 입체적으로 이해해 나갈수록, 결국 지금의 인류를 만들어낸 것은 협력과 연대라는 점이 확실해진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 속 선한 측면을 신뢰하되, 폭력이라는 그에 상반되는 요소가 존재함을 알고 선한 측면을 강화하며 인간이 진정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대립과 갈등의 표면에서 벗어나 그 이면에 존재하는 ‘인간 본성’에 주목할 때다.

 

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

리처드 랭엄

이유 옮김

480쪽

을유문화사

2020년 11월 30일

 

 

휴먼카인드

뤼트허르 브레흐만

조현욱 옮김

588쪽

인플루엔셜

2021년 3월 2일

 

삽화: 정다은 기자

rab4040@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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