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조선시대 대표적 실학자로 평가되는 박지원(1737~1805)과 박제가(1750~1805) 서거 200주년이 되는 해다. 최근 이를 기념한 학술대회, 실학축전 등 다양한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최근 정약용, 안정복 등 실학자들에 대한 재평가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국내적으로 개혁이 가장 큰 화두로 논의되고, 국제적으로도 21세기 정보화 사회로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시점에서 실학은 한국 사회에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을까?

『대학신문』에서는 ‘18세기 조선 후기의 ‘실학(實學)’이라 불리던 사상적 흐름이 한국 사회가 19, 20세기의 ‘근대(近代)’로 나아가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갗를 주제로 ▲실학이란 무엇인가 ▲근대란 무엇인가 ▲실학이 근대로 이어졌는가 ▲오늘날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에 대해 논의하는 대담을 마련했다.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참석한 대담을 통해 실학과 근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기를 바란다.

■ 일시: 10월 4일(화) 오전 10시
■ 장소: 호암교수회관 플럼룸
■ 참석자(가나다 순)
     김상준 교수(경희대ㆍNGO대학원)
     송영배 교수(철학과)
     이영훈 교수(경제학부)
     이태진 교수(국사학과)
■ 정리: 차병섭 학술부장
■ 그래픽: 김혜성, 이청아 기자
■ 사진: 이현진 기자

1.실학이란 무엇인가

­이영훈 교수(이하 ‘훈’): ‘실학이 근대지향적 사상인갗를 둘러싼 논쟁은 1950년대부터 진행돼, 60년대에 본격화됐다. 당시 한우근, 전해종 교수는 실학을 ‘16세기에 정립된 조선 성리학이 송의 주자학을 넘어 공맹의 원시 유학까지 추구 대상으로 삼고 사유의 지평을 넓힌 것’이므로 조선 성리학의 발달ㆍ심화 과정이라 봤다. 반면 이우성 교수는 봉건제의 해체기에 나타난 신분평등 추구 등을 예로 들며 근대지향사상이자 민족주의적 사상이라 봤다. 이후 이우성 교수의 학설이 대세였다.

그러나 실학의 사유체계와 당시의 사회경제적 동향을 볼 때 이 교수의 실학론이 정당했는가는 의문이다. 오히려 조선성리학의 자기발전과정으로 17, 18세기 실학을 이해했다면 한국 사상사 연구의 폭이 심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송영배 교수(이하 ‘송’): 18세기 사회생산력 발전이 근대와 연결됐는지 의문이다. 중국에서도 명나라 말기 면방직업과 같은 고용노동이 나타나는 등 서양보다 빨리 자본주의 맹아가 나타났다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자본주의ㆍ중상주의로 발전하지는 못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사회생산력 변화가 있었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근대화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리고 성리학의 발전선상에서 실학을 이해하자는 이영훈 교수와는 의견이 다르다. 오히려 사변적 성리학에서 선진시대의 고학으로 돌아가자는 논의 선상에서 실학을 파악해야 한다. 17세기 서학이 전래되면서 기존의 중국중심주의,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을 부정하게 됐다. 중국 문화를 상대적으로 보고 주체적 인식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학자들은 성리학을 허학(虛學)이라 하고 선진시대 유학을 실학이라 봤으며, 성리학을 극복하고 경세치용(經世致用)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실학은 성리학과 구별되는, 조선의 주체적인 학문으로 봐야 한다.

­이태진 교수(이하 ‘진’): 두 분 견해는 모두 타당하다. 한우근 선생의 주장은 조선 초 성리학을 너무 비(非)이용후생적인 학문으로 간주한 점이 문제다. 조선 초에도 중농정책을 통해 국부증진과 민생 향상을 위한 노력이 많은 성과를 거뒀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이용후생의 입장과 같다. 조선 후기에는 여기에 수단이 보강된 것이다. 그리고 조선 초에는 민생개선을 위해 ‘민본(民本)’이란 말로 이데올로기성을 부여했다. 후기의 탕평군주와 실학자들도 ‘소민(小民) 보호’를 강조했다. 조선 초기에 대한 관점을 바꾸면 실학 논쟁 해결의 길이 열릴 것이다.

한편 서학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세계관이 생기고 각국(各國)중화주의로 나아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학자들이 유교의 도덕정신을 바꾸지는 않았다. 이를 과거에는 민족지향적이라 평가해왔다. 두 가지 면을 종합하면 실학에 대한 견해차를 좁힐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인들의 개혁지향사상을 실학으로 볼 수 있다.

김상준 교수(이하 ‘김’): 김용옥 선생이 실학 개념의 무용성, 무근거성을 지적했는데, 그 과정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것을 함께 버렸다. 실학은 1930년대 정인보 선생이 신채호 사학을 계승하면서 강조되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에서 조선에 미래가 있느냐는 절박한 자문 속에서 조선의 태내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시도가 실학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내 경우 조선후기사회를 공부하면서 ‘유교적 근대성’이라는 개념과 시각의 필요를 느꼈지, 실학이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취지와 정신은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실학’이란 용어의 역사적 실재성, 개념의 엄밀성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에서도 실학은 나라마다 그 의미가 다르다. 중국은 리학(理學)을, 조선은 더 포괄적으로 보려는 시각도 있지만 대체로 남인계열의 유학사조를, 일본은 양명학 계열에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한 세력을 가리켜 실학이라 본다. 유교적 근대성이라는 개념이 조선후기 사회변화의 전모를 좀 더 효과적이고 포괄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하고, 여기서 실학 개념이 좀 더 다듬어진다면 사상사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훈: 17세기 이래 서학의 영향은 한우근 선생이 선구적으로 강조한 바 있다. 한 선생은 서학이 성호라는 실학자에게 큰 충격을 줬으나, 성호의 기본적 사유체계는 여전히 성리학이라 봤다. 이태진 교수의 말씀처럼 서학도 기본적으로 유학의 천리관(天理觀) 속에서 소화된 것이었다면, 서학이 근본적 세계관의 변화를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좁은 의미의 주자학을 넘어서 공맹(孔孟)의 원시 유학을 추구한 것이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한편 1930년대 조선학 운동으로부터 실학개념이 쓰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1920년대 다카하시 등의 일본인이 조선의 사상사를 정리하면서 먼저 실학을 강조했다. 조선도 문명의 파트너로서 일본제국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로, 식민지 통치를 위해 발견된 것이다. 이후 그것이 조선학으로 수용되고 민족주의 사상의 큰 줄기로 발전했다.

18, 19세기의 새로운 학풍의 주역은 노론, 낙론(洛論)으로 이어지는 지배층이었다. 학파 연구 결과에 의하면 결국 집권세력이 중국문명과 교류를 추진한 것이며, 실학은 성리학적 사유가 순화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이들이 지방 사림을 누르면서 조선을 성리학 세계로 심화시켜 가는 큰 틀에서 파악해야 한다. 실학이 새로운 세계관과 사회를 꿈꾼 혁명가들의 사상인가는 의문이다.

­송: 물론 실학을 시작한 측은 경화사족이다. 그러나 조선은 과거제를 통해 사회신분을 정했는데, 과거제의 내용이 성리학이었다. 이 변화의 동기가 서학일 뿐, 서학적 세계관으로 변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성리학 중심의 천리를 부정하고 경세로 나아간 것은 자신들의 세계관에 대한 부정과 극복의 시도라 볼 수 있다. 조선에서 20세기 초까지 성리학적 세계관이 유지되고 화서(華西)학파 등으로 이어지긴 했으나 조선사회 자체 내에서 청조에 유입된 서구의 천문ㆍ지리 지식을 보고, 우리 나름의 문화의식을 갖고자 했다. 홍대용의 오행 부정, 정약용의 리(理ㆍ근본)를 속성으로 치부하는 모습 등이 예다.

­진: 정인보 이전에 다카하시가 실학자를 거론했지만, 이들 사이에는 입장 차이가 있다. 다카하시가 노론 경화사족을 실학자로 평가했다면, 정인보는 남인계열을 실학자로 봤다. 또 다카하시는 조선을 동화시키려는 입장이고, 정인보는 당시 팽배했던 유교 망국론을 극복하려 했다. 또 ‘유교적 근대성’과 같은 방향으로 실학논의가 정리돼야 한다. 조선 사회가 변함에 따라 유교 스스로 변신을 꾀하는데, 그 모습은 근대지향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과거의 실학 논쟁을 딛고 새롭게 정리해야 한다.

2.근대란 무엇인가

­김: 지금까지의 실학관이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던 근대관ㆍ근대성 이해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는 사회과학 전반에도 광범하게 공유되고 있다. 즉 근대, 근대성(modernity)이란 특정 시점과 지점, 즉 서유럽의 어느 곳에서 15-16세기의 어느 즈음에 유일하게 발생하여 이후 확장ㆍ복제되어 갔다고 보는 견해다. 그렇게 보면 조선의 근대에 대한 논의란 결국 오리지널한 서양 근대와 몇 퍼센트 비슷했느냐를 가지고 근대성의 정도를 판명하는 것이 된다.

최근 사회학계에서는 근대성을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해 보자는 움직임이 있다. 복수의 근대성(multiple modernities)론은 그 중 하나다. 나는 근대성의 기원이 여럿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니 그 전개 역시 다양했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유교적 근대성이라는 생각이 나온다. 물론 근대성 표출의 어떤 보편성은 존재한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근대의 고유한 특징을 볼 수 있다. 실학논의에서 전제됐던 근대에 대한 관점을 변경해야 지금까지 실학론이 가졌던 개념적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

­훈: 이우성 교수의 실학의 범위는 너무 넓다. 그는 민족주의적 학풍, 경세치용의 학풍을 중요하게 보고, 평등주의적 인간관을 내세웠으나 그것이 근대의 징표는 아니었다고 재해석할 수 있다. 다만 송영배 교수의 말씀대로 홍대용, 정약용 등이 성리학적 사유체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인간관을 모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말, 19세기가 되면, 더 이상 학파라고 할 수 없다. 개별적 차원에서 성리학 사유체계를 부정하고 해체하는 것, 그 원인이 서학의 충격에 의한 것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전통 성리학과 서학의 충돌에 대해 엄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서구의 근대만이 근대’라는 서구 중심주의에 반대하며, 한 모델을 기준으로 발전 정도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문명간의 접합, 충돌과정이 있을 뿐 하나로 정의할 수 있는 근대는 없기 때문이다. 일본이 근대화했더라도 유럽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근대라는 모호한 용어는 차라리 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송: ‘유교적 근대성으로 실학을 이해하자’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또 근대의 역사적 형태는 다양하지만, 근대란 핵심적 내용이 없고 각 나라마다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 비록 근대가 서양 개념일지라도 19세기 이후에는 전지구적 개념으로 변했다. 사유권에 기초를 둔 개인주의, 개인과 국가 간의 사회계약설이 그 바탕이었다. 그것이 각 문화마다 획일적이지는 않으나 적어도 공동체 운영 방식과 개인의 참여방식에 있어 재산권과 사회계약설이 우선이라는 것은 공통적이다.

또 근대 이전에는 자연세계와 인간세계가 하나의 세계관으로 통했다. 자연현상의 변화는 모두 도덕적 함의를 가졌다. 태양이 도는 현상도 신의 의미를 실현하려는 것으로 보는 목적론적 세계관이 예다. 그런 것들이 없어지고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 인간을 역사의 주체로 본 것이 근대 이후의 변화다. 헤겔은 ‘인간의 의지대로 자연을 바꿔가는 것이 역사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양한 형태의 근대성을 말하더라도 개인의 활동과 재산권 등 자연에 대한 인간의 주체적 관점은 근대의 공통된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교적 근대성이 무엇을 함의하는가, 실학이 근대와 맥락이 닿아있는가. 개인주의와 기계적 세계관,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본다면 유교가 자기 틀을 넘어 과연 근대로 나올 수 있었느냐는 의문이 든다.

­진: 근대라는 용어는 학문적 편의를 위해 써야 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근대는 한국사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본다. 이때, 사회사적인 면에서 신분제 해체가 근대 이전과 후의 가장 큰 차이다. 개항 이후의 ‘구본신참(舊本新參)’이란 말에서 구본(舊本)은 국가의 역할을 기본으로 두고 유교적인 것을 유지하는 것이다. 신참(新參)은 서양 기계문명의 우수함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며, 이를 근대화의 과제로 삼았다. 신분제 타파는 자체적으로 이뤄져왔고, 기계문명 수용은 서양 문명과의 만남에서 제기된 과제다. 이때 기계문명 수용도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이용후생의 계열에서 속한다. 고종 시대에는 부의 증대를 강조하면서 그것이 국가, 왕의 책무라 말하고 있다. 이것이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국면 아닌가.

그동안 실학자 연구는 국가, 왕정과의 관계를 너무 소홀히하고 개인 중심으로 연구돼왔다. 영정조 시대 실학자들의 이력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 조정 신하였다. 정조는 개혁의지와 폭넓은 지식을 가졌던 사람이다. 실학자를 조정과 분리해 재야학자의 개혁 사상이라 보는 잘못된 인식을 극복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영조 때 제기되고, 정조에 의해 규정된 ‘민국(民國)’이란 말에 주목해야 한다. 유교적 의미의 국가는 ‘민(民)’이 아닌 ‘가(家)’에 의해 이뤄진다. ‘갗는 왕실뿐 아니라 귀족가문을 뜻한다. 정조대에 오면 ‘갗 대신 ‘민국’이란 말을 쓰면서 민과 왕(국)이 국가의 주역이란 개념을 만든다. 이것은 군민일체 사상으로까지 발전한 것으로 실학자들의 신분제 타파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19세기에 발달하는 민권의식과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김: 유교적 근대성이라는 개념을 짧은 시간에 설명하기는 어렵다. 처음 설명했을 때는 정확히 전달되지 않아 오해를 받기도 한다. 복수의 근대기원론은 어떤 공통분모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전의 근대성이론이 생각했던 것보다 추상도를 높여야 한다고 본다. 그 일부로서 유교적 근대성도 공통분모를 공유한다. 이런 차원에서 현재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근대성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성(聖)과 속(俗)의 통섭관계 역전이다. 이는 두 개의 동심원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근대 이전에는 성이 속을 포함하고 인간 삶을 지배했다. 즉 성이 바깥의 큰 원이고 그 안에 속의 작은 원이 통섭되어 있었다. 그것이 근대에 와서 역전됐다. 둘째, 가속적인 성찰성(accelerating reflexivity)이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첫째 측면이 본원적이고 우선적이다. 기타 여러 특징을 여기서 도출할 수도 있다.

이 특징들은 조선 후기사회에서 예(禮)의 확산을 통해 예적 신분질서가 동요해 갔던 신분제의 유교적 와해 현상, 근대주권론의 유교적 형태의 발현, 근대 대중조직ㆍ운동의 유교적 발현 형태 등 유교적 근대의 진행 속에서 고스란히 찾아 볼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 과정이 유교사회의 내적 논리에 따라 진행된다는 점이다. 서양, 서학의 존재와 영향은 기왕에 생각해 왔던 것보다 상당히 광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최한기는 평지돌출한 이례적 인물이 아니라 16,17세기 초부터 중국을 매개로 한 서양과의 교류가 몇 백년 누적되면서 나타난 결과다. 그러나 이 영향도 조선 유교사회 내부의 변화의 맥락 속에서 이어 봐야 이야기가 연결된다.  

3.실학이 근대로 이어졌는가

훈: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유럽 기원의 문명을 근대라 정의할 때, 그 핵심을 지적한 송 교수의 말은 타당하다. 왜냐하면 자연과 인간이 보편적 도덕으로 통합돼있다는 중세적 인간관이 해체되고, 자립된 실체로서의 인간을 발견-송 교수의 말에 따르면 개인주의, 경제학에서 아담스미스가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라 본 것-한 것이 서유럽의 근대다. 이를 빼고 근대를 논한다면 19, 20세기에 가해진 충격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신분제 해체는 이미 17세기 후반부터 송시열 등 보수적 인물이 앞장섰던 것이다. 실학자 중에는 유형원, 이익 등이 노비제가 천하의 악법이며 성리학에서 노비는 철학적 근거가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군자와 소인의 관계를 인정하면서 이 관계를 폐기할 수 없다고 봤다. 여기서 조선 사상사가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 새롭게 발견한 인간관계를 어떻게 통합할 것인지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것이 직업윤리 확립, 군자와 소인이 나눠지면서도 인격적으로 지배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었는데,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서 혼란을 겪고 국망을 당한 것이다. 결국 성리학은 평등하고 개인주의적인 근대적 인간을 발견하지 못했다.

­송: 이영훈 교수 의견에 동의하고, 그런 관점에서 다시 ‘유교의 근대성’에 대해 말하고 싶다. 막스 베버 이래 근대성을 ‘성속(聖俗)’의 대립적 개념으로 보는 것은 보편적이다. 그런데 아무리 실학자라 해도 기계적 자연과 사회계약론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군자와 소인, 신분제 등이 있지만, 유교 자체에서 근대성을 찾는 데는 한계가 있다.

유교적 사유 중에 서구에 대응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인 ‘구본신참’(舊本新參)이 실패했다. 이는 근본적으로 공리타산적 생각보다는 동도서기(東道西器) 가치관이었으므로, 침략에 대적할 수 없었다. 유교 내에 근면, 성실 등 자본주의화될 수 있는 바탕은 있지만 가치관적으로 모든 것을 도구화할 수는 없었다. 도구적 이성은 근대의 큰 장점이었다.

실학에서 혹 ‘민권의식’이 제기됐더라도, 그것을 서양과 동질화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전통적 가치관이 깨지고 난 후 아시아의 후발적 자본주의에 대해 생각할 수 있으나 유교적 틀 안에서는 불가능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것도 개화파가 추진한 실리주의에 전통 세력이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 19세기 민(民)의 자각이 개인의 발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민의 자각이란 민이 유교윤리실천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기존의 사대부 중심에서 벗어나 서민 대중의 자각 의식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런데 유교적인 근대를 서구 근대문명을 수용할 수 있는 토양으로 볼 수 있으나, 그 속에 서구의 근대적인 것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유교 자체에 단계적인 발전적 변화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서구적인 근대와 한국, 동양적인 근대를 아우를 수 있는 논의는 앞으로 별도로 진행돼야 한다.

실학과 근대의 연관성은 박규수를 통해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개국을 주장하고 왕에게 영향을 줬다. 고종도 박규수의 영향을 받은 실학자로서 개항을 서둘렀다. 한편 갑신개화파에 초점을 맞춰 유교 근대 지향성의 한계를 말하는 것은 유보해야 한다. 고종의 광무개혁을 통해 추진된 근대화가 국권을 잃으면서 기회를 잃은 측면이 있다. 고종 시대에 대해 부정적 역사인식을 하면 실학과 근대가 단절돼, 지성사의 흐름을 연속적으로 볼 수 없다.

­김: 유교적 근대의 역설을 말하기 위해 예를 들어 보겠다. 아시아, 일본 전통을 전면 비판, 부정하는 유럽파 일본 지식인들과 대화한 적이 있다. 묘하게도 학문에 대한 태도나 문제의식이 막부 말기의 양명학파 지사들과 비슷하다는 말을 했다. 즉각 그렇다면 한국의 학생운동, 사회운동은 조선 유학자의 도덕운동과 흡사하다는 응수가 왔다.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한국 민주화운동은 유교적 전통을 부정했으나 사유와 행동의 구조에서 그 영향은 발견된다. 중국의 천안문 사태가 중국 전통사회 유학자들의 항의와 행동 패턴이 비슷하다는 연구는 이미 많다. 이 예의 어느 주체도 스스로 자신의 행동이 유교주의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연코 그 반대다. 이 역설 역시 근대성에 대한 이해의 심화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근대성이란 어떤 예정된 청사진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성취한 것 속에서 부단히 비판의 계기를 찾아내고 한 걸음 더 나가는 속성이 있다. 앞서 말한 근대성의 핵심특징은 이런 면을 포괄한다. 유교 내에도 자기 극복정신, 자기 비판정신이 잠재되어 있다. 가속적 성찰성이란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금까지의 논의들이 유교의 보수성만을 보고 이런 점을 간과하는 것도 문제다.

유교적 근대성 이론이 전통 또는 기존질서에 대한 변호론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바란다. 비슷한 이름을 가진 이전의 유교적 자본주의론, 유교적 민주주의론은 변호론의 논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객관성이 의심되었다. 이 점을 유념하고 있다.

4.오늘날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훈:  오늘날 민주화운동 속에서 유교적 근대를 볼 수 있다는 데 동감한다. 하지만 근대를 말할 때 ‘가치로서의 근대’를 모든 지역에 공통되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본다. 근대가 자기성찰능력이 있어 자기 발전한다는 식으로 근대를 지상화하는 태도는 문제다. 현재 한국의 민주화 세력의 과거 청산에서 사림의 모습을 본다. 국가의 잘못을 비판하고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은 사림과 민주화 세력이 유사하다.

18세기는 한국 고유 문명사에서 성리학적으로 사회를 통합하고자 한 사상적 실험의 시대였다.  국가가 주된 역할을 하고 시장이 보조적인 역할을 하면서 균(均)의 이념에 입각해서 가(家)를 배제하고 민(民)을 직접 통합하고자 했던 것은 한국사만의 독특한 문명이다. 그 속에는 근대를 맞을 수 있는 여러 요소가 있었다. 한국의 경제발전도 문명의 힘이 뒷받침했다고 본다.

그러나 새로운 문명의 도전을 맞았을 때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현재 과거사 청산 문제만 하더라도 도덕적, 운명론적, 목적론적 서술을 하고 있다.   유학은 우리의 운명이지만 문명사적 전환과정에서 무엇을 해야 되느냐에 대해서는 비판이 필요하다.

­송: 하버마스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연을 지배하는 “도구적 폭력성의 합법화”과정으로 보면서, 다른 측면에서는 이런 도구적 폭력성을 이성적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세계화, 디지털화, 인공지능의 발달 등을 보면, 합리적 소통이라는 성찰적 자구(自救)능력이 서구적 근대 속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또한 유교사상 자체 내에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도 서구적 근대화에 비견되는 ‘유교식’의 민권 성장을 말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19세기 조선의 ‘실학적 세계관’은 서구열강의 도구중심, 과학 중심주의의 침탈을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물론 그 역부족이 유교무용론, 유교 폐지론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며, 사실을 정리하는 지식인의 지혜와 책임 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실학은 식민지 지식인들의 심리적 위안을 위해 이념적으로 이용된 측면이 있다.

이제 다시 17, 18세기 조선사회로 돌아가 ‘실학’의 현대적 의미를 따져보자. 당대 조선의 성리학자 대부분은 청국의 우수한 문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성리학적 폐쇄성에 도전한 것이 ‘실학’의 역사적 의의다. ‘소중화주의’에 도전하여, ‘화이(華夷)’의 문제를 어떤 지역의 특정 문제로 보지 않고 상대화해서 한국도 문화주체(華)가 될 수 있다는 실학(홍대용)의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근대와 상관없이 조선의 문화적 주체성을 찾았다는 측면에서 실학의 의의는 지금 더 주목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현실을 보면, 유학적 윤리의식이 여전이 강하지만 오히려 유교적 가치관이 무시되는 측면도 많다. 근시안적인 이해타산과 세력조화에만 밝을 뿐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는 아무 대책이 없다. 하버마스나 독일 철학자들이 맑스의 노동의 측면만 보지 않고, 독일관념론 속에 온존해 있는 인간 이성의 실천(도덕)적 의지를 각별히 성찰했듯, 우리도 기술주의ㆍ산업주의로 인해 생긴 우리 ‘삶’의 주체성(본연성)의 왜곡과 소외, 자연파괴 등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우리 나름의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런 문제와 연관해 볼 때, 일단 성리학적 틀은 벗어났으나, 여전히 유교적인 전통 안에서 고민을 했던 실학자들의 철학적 문제의식은 지금 재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실학은 내재적으로 자본주의화한 것은 아니고 그 한계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세계 시장 속에서 새로운 지표를 정하자는 현 시점에서 독일 관념론이 독일에서 새롭게 문제되듯이, 지금 우리 한국에서도 유학에 주목하고, 특히 ‘탈-중화주의’를 외치며 성리학의 틀을 부정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며 자기문화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했던 조선 실학자들의 주체적 문화의식을 재평가해야 한다.

­진: 우리 근대화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지만 부정해서는 안 된다. 지나친 비판과 부정은 결국 자기상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지금 실학과 근대 담론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현대 한국인들의 국가관을 바르게 하는 기회, 그리고 민과 평등 의식의 문제를 제대로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고, 개혁의 측면에서 주목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집권층인 386세대의 역사관, 현실관은 의식화돼있어 자기기준에서 선별적으로 역사를 인식한다. 개혁사로서 실학 근대 담론도 나머지 부분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개혁가로서의 실학자가 아니라, 왕정체계 속에서 실학자들이 자리하고 있는 신하로서의 위치 등을 포괄적으로 봐야 우리 역사상의 개혁에 대한 인식, 역사 교육이 제대로 될 수 있다고 본다. 19, 20세기 우리의 전통문화는 약육강식논리에 졌다. 그러나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우리가 버리지 않은 도덕주의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견지했던 논리가 오늘날 세계에 통용되는 논리와 가까우므로 전통을 재발견해야 한다.

­김: 이영훈 교수 말씀을 거칠게 유교를 비판할 것이냐 두둔할 것이냐의 택일로 본다면 나 역시 단연코 비판 쪽에 서겠다. 그런데 여기서 확인할 점이 있다. 유교를 강력하게 비판해 온 한 철학자에게 선생의 그 끈질긴 비판정신은 어디서 오는지, 또 우리 자신의 유교에 대한 비판정신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물은 적이 있다. 역설적이지만, 상당한 부분 유교적 전통에서 오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지 않은지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는 그도 고민해 보겠다고 했다. 

서세동점에서 졌다, 여기에 충격과 단절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를 근대성의 이론구성에 그대로 등치시킬 수는 없다. 근대성은 훨씬 장기적인 시각에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을 바탕으로 거꾸로 역사를 추적하여 재구성하였던 점이 막스 베버 근대성론의 핵심적 오류라고 생각한다. 소위 결과주의의 오류다.

이태진 교수가 민과 국(왕)의 직접연결로서 민국 사상을 말했는데, 사실 정조가 중용한 근기 남인의 정치관은 귀족세력을 무력화시켜 주권을 군주의 절대적 독점영역으로 하고 왕과 민을 직접 연결해 부국강병하자는 것이었다. 주권의 비공유성은 근대주권론의 핵심이다. 여기에서 근대주권론의 유교적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아울러 여기서 근린세력의 왕권비판에 대해 허용하지 않는 논리도 나온다.

이 논리를 가장 많이 써먹은 것이 박정희 정권이다. 박 정권의 근대화, 부국강병 논리는 실학 논의를 가장 많이 도입했고 이용했다. 다산과 남인이 주류세력에게 밀려나 엄청난 고초를 받았는데 박 정권이 이를 이용했다는 것도 역사의 굴절이다. 이영훈 교수가 정치와 도덕의 분리를 근대성의 핵심징표라 하고, 또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해 왔지만 그건 신화라 본다. 오늘날 이라크 전쟁 등에서도 드러나지만 정치와 윤리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문제는 어떤 정치, 어떤 윤리와의 결합이냐지 정치와 윤리의 결합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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