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대학 게시판에는 도서관에서 키스하는 연인들을 질타하는 글이 올라왔다. 키스하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는데, 소리 나게 키스하는 건 참기 힘들다는 분노의 목소리였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키스를 소리에 따라 구분하면서 “입맛을 다시는, 쉿 소리를 내는, 찰싹 또는 꽝 부딪치는 그리고 굉음을 내는 키스. 어떤 키스는 공허하게, 어떤 키스는 낭랑하게 울린다. 또 어떤 키스는 면직물을 찢을 때 나는 소음을 낸다”라고 말한 바 있다. 고대 인도의 성 지침서 『카마수트라』에서 키스는 ‘혀의 전투’로 표현된다. 그 도서관 연인들도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있었을 테니, 아마도 키에로케고르도 들은 적이 없는 엄청난 소음이 났을 것이다. 때로 눈살을 찌푸리게도 하지만, “연인들은 키스와 시원한 물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프랑스 속담처럼 키스 없는 연애는 상상하기 어렵다. 생물학적으로 키스를 통해 주고받는 것은 피지와 타액일 뿐이라지만, 연인들은 키스를 통해 서로의 감정을 나누며 둘만의 친밀한 세계에 빠져든다. 아무런 감정 없이 키스하는 것은 당구공뿐이다.
그러나 키스는 가끔 위험할 수도 있다. 얼마 전 법원은 안전띠를 매지 않고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성이 운전자와 키스를 하던 중 교통사고가 나 다쳤다면, 여성에게도 40%의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역사적으로 지위가 낮을수록 상대에게 키스하는 부위는 얼굴에서 점점 더 멀어졌다고 하지만, 입의 키스, 더욱이 혀의 키스는 다른 어떤 성 행위보다도 동등한 자격으로 이루어지는 평등한 행위라고 한다. 그 교통사고 커플이 입과 혀로만 키스했다고 가정한다면, 판사는 제법 현명한 판결을 내린 셈이다.
나를 포함해 당구공보다 외롭게 가을을 맞고 있을 솔로들과, 그 도서관 및 교통사고 커플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연인들을 위해 바로크 시대의 시인 파울 플레밍의 시 한 구절을 덧붙여 본다. “모두가 알다시피, 키스는 누구나 원하는 것, 해야만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나와 그녀만이 알고 있네, 우리가 어떻게 올바로 키스할지를. ” 〈소래섭 간사〉
소래섭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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