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현 교수(철학과)
김기현 교수(철학과)

무임승차했던 것은 사실이다. 세계 최빈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가를 이끌어갈 인재를 생산하는 일은 시급했고, 정부는 국립대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했다. 서울대에 수재들이 몰려들었고, 국가의 발전을 견인한다는 자부심을 얻을 수 있었다. 스스로 각고의 노력보다 애초부터 뛰어난 인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구조의 덕을 본 명성이라 어느 정도 무임승차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무임승차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구성원들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밤새 연구실의 불을 밝히며 선진국과의 격차를 좁혀나갔다. 비록 다른 대학들의 교수에 비해 지갑은 얇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리더를 양성해 우리 사회를 좀 더 살만한 곳으로 이끌어 간다는 자부심이 그 공백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대의 동력인 자부심과 명예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부도덕한 지식층의 상징인 <오징어게임〉의 조상우. 그가 서울대 출신임이 주목을 받는다.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서울대를 이용했다고 항변하려니 대중의 시선이 눈에 밟혀 궁색하다. 지난 정권에서도 그렇고 현 정권에서도, 국가 지도자를 지근한 거리에서 보필하며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역할을 맡았던 서울대 출신의 관료들이 줄곧 부끄러운 동문상 1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연구와 교육도 기로에 서 있다. 바이오와 정보 통신 기술이 주도하면서 세계는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다. 추격 경제의 문턱을 넘어 선진국들과 경쟁해야 하는 우리나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도 서울대는 정체하고 있다. 산업계와의 원활한 교류가 필요한 연구환경은 온갖 규제에 갇혀 있고, 교과과정은 전통적 지식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며, 다양한 분야를 가로지르면서 양육돼야 할 창의적 사고는 울타리에 갇혀 질식할 지경이다. 새로운 변화를 선도해나가지 않으면 서울대는 명예와 자부심이라는 동력을 잃어가고, 얇은 지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교수들이 산업체로, 다른 대학으로 이직하는 현상을 단지 몇몇 구성원의 특이한 취향으로만 볼 수 없다. 

리더십이 관건이다. 강의와 연구에서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는 많은 동료를 주위에서 볼 수 있다. 아래로부터의 고된 노력이 빛을 발하려면 포괄적인 청사진을 제시하는 위로부터의 개혁과 만나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인재상에 대한 고민, 그런 인재를 배출하기 위한 교육과정과 체제 개혁에 대한 고민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몇몇 위원회와 설문을 통한 탐색의 몸짓은 있으나, 말잔치를 넘어 구체적 변화의 실행에서 오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대화와 설득은 찾아볼 수 없다. 서울대를 위한 비전과 신념의 빈곤이 낳은 결과다.

출석부를 제출하라는 교육부 감사에 머리를 숙여 각 대학의 행정 인력이 며칠을 밤새 출석부를 수합하고, 보강을 위한 규제적 제도를 만드는 데에 골몰하는 사이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자로서의 자부심은 왜소해간다. 창의적 인재상을 위해 도입한 수시 모집을 줄이라는, 시대를 거스르는 정치권의 압력을 별 논란 없이 수용하는 모습에서 또 다시 비전과 신념의 빈곤을 본다.

정부지원금이 삭감될까 두려워 압력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말은 구차한 핑계다. 시대를 선도하는 인재와 연구를 스스로 생산하는 역동적 기관에 대해 외부에서 시시콜콜한 규제를 들이대며 감놔라 배놔라 할 수 있을까? 압력 때문에 비전을 실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이 없기 때문에 압력에 시달린다. 비전과 리더십이 없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신망과 기부를 받지 못하고, 압력에 더욱 시달리는 것이다. 

현실에 안주한다면 서울대는 명성을 잃고, 더 큰 외부의 압력에 시달리며 서서히 가라앉을 것이다. 선장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비전과 신념을 갖고, 개혁의 밑그림을 그리고, 사심을 버리고 좌고우면하지 않으며 국민과 공동체를 설득해나가는 수장이 필요한 이유다. 그럴 때 캠퍼스에 만연한 무관심의 질병은 치유되고, 구성원들은 서울대를 서울대이게 한 동력과 활력을 회복하는 길에 함께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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