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준(법과대학 박사과정)
이범준(법과대학 박사과정)

어느새 40대 후반에 들어섰지만 이제야 박사과정에서 공부 중이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 책을 읽는다. 앞으로 혹시 운이 좋아 학위를 받는다고 해도 그 이후가 보이는 것도 아니다. 후속 성과를 꾸준히 내 학문에 기여하기도 쉽지 않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기회를 잡기도 간단치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고 있을까.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없는데, 잊을 만하면 주변에서 물어 비로소 생각하게 됐다. 그러고 보니 나는 왜 공부하고 있는지 나에게 묻지 않아 왔다. 

나는 문학을 공부하고 20대에 신문 기자가 됐다. 우아하게 기사만 쓰면 되는 줄 알았는데 업무 대부분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 내성적이라서인지 사람 만나는 일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러다 법조를 담당하게 됐는데, 취재원을 만나지 않는 시간에는 법서를 읽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일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와 소설만 읽어온 나에게 법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시인 정현종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알려줬는데, 민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계약이 있다고 선언했다. 소설과 시로 가득하던 책장이 헌법과 민법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업무와 공부의 주제가 비슷하지만 꼭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기사체 글쓰기에 익숙한 탓에 학문적 글쓰기가 좀처럼 되지 않아 힘들다. 비유하자면 기사는 시에 가깝다. 설득하는 글이 아니라 호소하는 글이다. 최근 들어 매체와 형식을 막론하고 사실보다는 주장이 강해지면서 더욱 그렇다. 어쩌면 논문은 기사의 대척점에 있다. 학문적 글쓰기는 주제에 관한 논의를 철저히 파악해 씨줄과 날줄로 엮은 다음, 자신의 아이디어로 매듭 짓는 일이다. 작은 빈틈 하나에 논지가 무너진다.

공부를 시작할 때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대학원은 저널리스트로 일하는 데 도움을 줬다. 논문으로 이뤄진 학문의 세계는 최첨단 의료기관 같아서, 사회와 시대가 앓는 갈등의 본질을 파악하고 상상하는 힘이 됐다. 최근 휴대전화와 노트북 등 전자 정보에 관한 무분별한 압수수색이 피의자의 방어권을 침해한다는 기사를 준비해 썼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다룬 서울대 법학 박사학위 논문이 있었다. 논문은 전자정보 압수수색을 소재로, 범죄 처벌과 인권 보호의 경계를 추구(追究)하고 있었다. 이렇게 현상 너머 본질로 나아가는 태도를 배웠다. 

영국 록밴드 퀸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는 61세인 2008년에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서 천체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박사과정을 마무리한 것은 20대다. 그는 퀸이 세계적인 밴드가 되면서 학교를 떠났지만 33년 뒤 공부를 다시 시작해 논문을 완성했다. 학위논문이라는 지점에는 도달했지만 그를 학자로 부르기는 망설여진다. 운전면허가 있다고 드라이버가 아니듯 학위가 있다고 학자는 아니다. 하지만 브라이언 메이는 평생 천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학위논문도 완성했을 테다.

돌이켜보니 나는 30대 이후로도 짧지 않은 기간 학생이었다. 주말마다 수업을 들어 방송대를 졸업했고, 다음에는 법학석사를 마쳤으며, 회사를 휴직하고 외국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남들만큼 잘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공부할 때 즐거웠다. 그런데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할수록 법이 설계한 세계를 규명하고 싶은 욕심, 적어도 학위논문을 완성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졌다. 브라이언 메이의 천문학 공부가 논문으로 완성된 것처럼, 나 역시 학위논문으로 공부를 일단락 짓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는 세계적인 록스타도 아니니 그보다는 빨리 마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