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인(정치외교학부·19)
서영인(정치외교학부·19)

학생회장이라는 직책 덕에 카메라 없는 사석에서 대선 후보와 얘기할 기회가 많았다. 그때마다 그들의 성격은 내가, 그리고 세간이 예측하는 것과 정반대였다. 강력한 마초 홍준표는 온데간데없고, 긴 침묵 속 “후보님 서울대에서 인기가 많으십니다”라고 말하니 “인기는 무슨…”이라며 살며시 웃는 웬 볼 빨간 사춘기 소년 한 명이 낯을 가리고 있었을 뿐이다. 진중한 신사 이낙연은 내가 친 농담에 경박스러울 만큼 하이톤으로 웃으며 마치 소프라노가 와인 잔을 깨는 듯한 충격을 선사하기도 했다.

재미난 것은 언론에 나온 후보의 이미지와 캠프의 성격은 놀라울 만큼 똑같다는 것이다. 일례로, 홍준표 행사 준비 당시 대면 진행을 강하게 요구하던 캠프진에 곤혹스러워하던 나는 통화 중 “회장 양반~ 뭐 그렇게 걱정이 많아? 그냥 해!”라고 말하며 마초 홍준표에 빙의됐던 한 보좌관을 기억한다. 후보가 캠프를 닮은 건지, 캠프가 후보를 닮은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둘 사이의 괴리는 엄청났다.

그러다 카메라가 켜지면, 후보의 성격은 마침내 캠프와 일체가 된다. 후보는 철저히 캠프의 지침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불현듯 시대의 혁명가, 젠틀한 신사, 터프한 독설가로 변신한다. 모 후보의 자료에는 ‘이대남’ 등 특정 단어 사용을 금지하거나, 후보의 특정 말투, 성격, 제스처를 강조하는 것까지 지시하는 내용이 있었다. 수십 명의 조지 레이코프가 만든 캠프 문서의 상단에는 뉴스 기사 헤드라인으로 나와야 하는 ‘타겟 문구’도 적혀있었다.

하지만 캠프의 뜻을 그대로 받아 적어줄 언론이 아니다. 언론은 캠프가 만든 후보의 이미지를 미세한 프리즘으로 왜곡해 ‘솔직’을 ‘무례’로, ‘젠틀’을 ‘무정’으로, ‘카리스마’를 ‘독고다이’로 전환시킨다. 부정적인 모습을 부각시켜 논란을 만들고, 지지자와 반대자가 싸울 즈음 슬며시 뒷걸음질 친다. 토크콘서트의 취지는 후보와 학생 간의 낭만적인 대화였지만, 실상은 캠프와 언론 간의 치열한 프레임 전쟁이었다.

행사가 끝나고 쏟아져 나오는 뉴스 기사를 읽노라면 전혀 논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후보의 말이 [속보]로 올라가고, 수많은 네티즌들의 지탄이 쏟아지는 모습에 어딘가 공허하기만 하다. 후보의 말은 캠프, 언론에 의해 조금씩 기울어지고(tilt), 급기야 180도로 반사(reflect)돼 문제 발언의 구체적인 맥락을 모르는 대중에게 전달된다. 언론이 만든 이미지에 분노하는 21세기의 네티즌과 있지도 않은 거인을 보고 돌진하는 17세기의 돈키호테는 별반 다르지 않다. 싸움을 붙이고 그 모습을 담아 파는 언론은 오늘날의 진정한 세르반테스라고 할 수 있겠다.

사회대에서 이준석 대표를 초청할 당시, 행사를 ‘예정대로’ 진행했다는 이유로 ‘철통보안 속 강행’으로 표현한 언론의 틸트(tilt)를 나는 기억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언론에 지배된 인식 너머 현상 그 자체를 보려 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윤석열은 무식하지 않고, 유승민은 재밌으며, 홍준표는 수줍고, 이낙연은 가볍고, 이재명은 미친 포퓰리스트가 아니었다.

제3제국 시절 독일 대중들이 ‘어디에나 있다’라고 생각했던 게슈타포(Gestapo)는 프랑크푸르트에 고작 50명을 배치했던 작은 조직이었다. 이안 커쇼(Ian Kershaw)가 『The Hitler Myth』에서 설명하듯, 언론이 만든 이미지가 현실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내면서 대중들은 더 이상 현상 자체를 신경 쓰지 않게 된 것이다. 박정희의 시체를 본 박승규 수석은 거인의 모습은 없어지고 “조그만 어린아이 같았다”라고 회고했다. 언론이 바람을 넣어 폭풍처럼 화려한 겉모습을 씌운들, 한가운데에 있는 정치인은 바람이 없어지면 한 줌의 고요한 모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린 ‘인물 보고 뽑는다’라는 흔해 빠진 인물 투표 원칙의 기본 가정을 의심해 볼 법하다. 우린 과연 후보를 제대로 ‘볼’ 수나 있는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언론과 캠프가 아닌가? 명확한 답은 없지만, 적어도 대중이 농간에 놀아나는 돈키호테가 되지 않으려면 ‘나는 저 후보를 안다’라고 과몰입하는 오만한 생각에서 벗어나는 인식론적 성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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