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신윤서 기자 oo00ol@snu.ac.kr
삽화: 신윤서 기자 oo00ol@snu.ac.kr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1853)에는 수수께끼와 같이 독특한 인물이 등장한다. 금융의 중심지인 월스트리트의 한 법률 사무소. ‘바틀비’라는 인물이 필기 노동자인 필경사로 고용된다. 마치 필사에 굶주린 듯, 기계처럼 많은 양의 필사를 소화하는 바틀비의 근면 성실한 모습은 변호사를 만족시킨다. 그러나 불과 사흘 뒤, 필사한 문서를 검토하라는 변호사의 지시에 대해 바틀비는 뜻밖에도 이렇게 말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그는 그 말만을 반복하며 점점 아무것도 안하는 편을 선택한다. 그는 노동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체의 행위를 하지 않고 월스트리트의 벽만을 바라본다. 결국 부랑자로 유치장에 수감되지만, 식사마저 거부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

바틀비는 지독한 고집불통의 인물을 뛰어넘어, 기묘해 보이기까지 하는 인물이다.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만약 그가 내 동료라면 함께 일하기 쉽지 않은, 아니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유형의 사람이란 것만은 틀림없다. 소설 속에서 화자인 변호사는 바틀비가 과거에 수취인 불명 우편물 취급소에서 일했다는 소문을 듣는다. 그리고 그 배달 불능 우편물들 속에서 무수히 많은 안타까운 사연과 죽음, 절망을 보았을 바틀비를 향한 변호사의 탄식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의 핵심 구절로 일컬어진다. 그는 누군가의 이윤과 이익만을 위한 언어를, 기록에 남겨지길 허락된 언어를 기계적으로 그대로 베껴 쓰는 것을 더 이상 안 하는 편을 택했다. 월스트리트 한복판에서 근면과 성실을 내면화하는 대신, 그 무엇도 안 하는 편을 택했다. 질 들뢰즈,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현대 철학자들은 바틀비를 시스템에 순종하지 않는, 즉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실존하는 저항적 존재로 의미화했다. 그런 바틀비의 태도에서 소극적이지만 동시에 적극적인 저항의 가능성을 읽은 것이다. 

바틀비는 모든 것이 숫자와 유용성의 가치로 환산되는 자본주의 시대에 노동, 나아가 사회적 질서를 거부하며 쓸모없게 되기를 자처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용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질서 자체를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수취인 불명 우편물들이 결국 소각되듯, 그 역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바틀비가 순응을 거부한 순간, 그는 더 이상 인식 가능하거나 대체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 불가해한 타자, 새로운 인식을 요하는 새로운 존재로 남게 됐다는 점이다. 고유한 이름이 아닌 별명으로만 불리는 다른 필경사들도 등장하지만, 이 소설이 본래 기록의 대상도 되지 못할 바틀비에 대한 유일한 증언을 수행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우편물의 목적은 수신인에게 도달될 때 달성되기에 수취인 불명의 우편물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틀비는 그 쓸모없는 수취인 불명의 우편물 속 안타까운 사연의 유일한 증인이기도 했다.

19세기보다 훨씬 촘촘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화의 그물망 속에서 우리는 더 심각한 비인간화와 인간소외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피로와 번아웃에 시달리면서. 점점 커져가는 혐오와 갈등, 폭력 속에서 소외된 수취인 불명의 편지들은 아마 또 다른 비명을 지르고 있을 것이다. 법률 문서로 대변되는 딱딱한 기록만을 기계적으로 필사하는 것을 잠시 멈추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곧 소각될, 수취인 불명의 언어들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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