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회 대학문학상 수상자 특별기고

지난해 제63회 대학문학상 소설 부문에서 가작으로 선정된 「얼굴을 잃어버린 사내」의 작가 고승민 씨(경영학과·19)의 작품을 싣습니다.

 

바위를 친 계란은 그냥 부서질 뿐이다.
명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부서졌다.

*

 “퇴근하고 나 좀 보세.”
 제제는 오전 업무를 대강 마무리하고 창밖을 내다보며 멍을 때리고 있었다. 그러다 조지 회장이 말을 걸자 화들짝 놀란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마치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조지에게 답했다. 제제가 심약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조지에게 사람을 압도하는 큰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강한 힘을 저 사내는 갖고 있었다.
 “뭘. 한 잔 하자는 거지.”
 “달리 부르실 분들이 있으십니까?”
 “둘이서 마시지.”
 제제는 놀랐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놀랐다. 비서실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십 몇 년이 다 됐는데도 회장과 술잔을 기울일 기회는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와 독대하는 사람도 적다. 제제가 알기로 그런 사람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다. 모모 이사라던가, 바바 부회장이라던가···. 조지는 자기 아들과도 대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예약은 어디로 할까요?”
 “귀찮게 뭘. 내 방으로 오게. 술이나 안주는 알아서 준비하시고.”
 알아서라니. 제제는 속으로 툴툴거렸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제를 신경도 쓰지 않으며 조지는 텅 빈 비서실을 유령처럼 지나갔다. 제제는 그런 회장의 모습을 보면 어떤 영적 존재의 흔적을 느꼈다. 달리 말하면 제제는 조지가 만화나 영화에서 튀어나온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지 자신이 굳이 그 사실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회장님의 의견서입니다.”
 “고마워, 제제 씨. 번번이 고생이 많아.”
 “아닙니다.”
 제제는 친절한 모모 이사의 사무실에 서류를 직접 전달하러 갔다. ‘의견서’는 조지 회장 특유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었다. 마치 왕이 심부름꾼을 시켜 칙서를 하달하는 것처럼. 그러고 보면 그는 진짜로 왕처럼 소통했다. 그에게 올라가는 결재 서류는 수없이 많은 반면, 그로부터 내려오는 코멘트는 몇 마디 안 됐기 때문이다. 눈에 띄게 의도된 불균형이다. 업계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 양의 코멘트조차 비서진이 대신 전달한다. 그것은 조지가 나름대로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는 방식이었다.
 그것을 제제와 모모는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일상 업무입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고보니 제제 씨도 십 년 차 아닌가?”
 “좀 더 됐습니다. 십삼 년인가, 십사 년입니다.”
 “굉장해, 정말. 그만큼 버티는 사람이 요새 참 드물거든.”
 “그런 것 같습니다. 동료들도, 비서실 선배들도 다들 퇴사했습니다.”
 모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지 밑에서 오래 일해봤자 십 년을 못 넘기지,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제제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척 하기로 했다.
 “오늘 저녁에 뭐 하시나? 술이나 한 잔 할래?”
 “죄송합니다. 저녁에 선약이 있습니다.”
 “그래? 아쉽네. 여자친구랑 저녁이라도 먹나?”
 “회장님께서 술을 마시자고 하셨습니다.”
 “조지가?”
 “네.”
 “참 재미있는 일이군.”
 그는 안경을 고쳐썼다. 제제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제제가 당혹감을 느낄 정도로 순수한 재미가 동했다.
 “달리 별 말은 없었고? 그냥 술을 마시자고 한 것이 전부?”
 “업무중이라 경황이 없었는데, 퇴근하고 술과 안주를 사 회장님 사무실에서 먹자고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땠어? 저 신비주의자가 먼저 술을 먹자고 하는게.”
 “솔직히 엉겁결에 대답하기도 했고, 저도 아직 잔무가 많이 있어 별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알기로는 회장님께서 일대일로 누군가와 술을 먹는 일이 잘 없어서, 무슨 뜻으로 자리에 부르신 건지 궁금하긴 합니다.”
 “말해줄까? 왜 저러는지.”
 싱글벙글. 모모는 제제에게 자리를 권했다. 제제는 모모의 호사가스러운 면모를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자신이 그 대상이 되니 유쾌하지 않았다. 모모는 대면 결재를 받으러 온 마케팅팀의 부장에게 나중에 올 것을 지시했다. 그는 이 일에 가당한 최우선의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조지가 왜 그런다고 생각해?”
 ‘그런다’니. 조지가 말하는 방식이랑 완전히 같다. 제제는 높은 사람들이란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걸 좋아하는 습성이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룹의 폐쇄적인 운영, 외부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행보, 비밀스럽고 협소한 인간관계···. ‘그런다’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은 많이 있었지만 제제는 쉬이 그 저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모모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모는 그 말을 꼭 하고 싶어 한다. 그것도 꽤 많이.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상상력을 발휘해봐.”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로서는 당장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악마와의 거래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네?”
 제제는 한순간 어리둥절해졌다. 눈 앞의 남자가 자신과 어떤 종류의 대화를 나누어 싶어 하는지가 순식간에 불명확해졌다.
 “제제 씨도 우리 그룹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대충 알지?”
 “네. 지방 토건 회사였고, 산업화 시기에 대규모 국책 사업에 선정된 것을 계기로 빠르게 성장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불황기에 다른 기업들을 인수, 합병하면서 지금의 형태가 완성되었고요.”
 “우리 그룹이 지방의 일개 토목 사무소였을 때에 대해서는?”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원래 아무도 모르는 얘기야.”
 이사는 실없는 농담을 한 것처럼 실실 웃었다. 그가 입을 열 때면 눈에 초점이 사라졌다. 그것은 그가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뭐든지 잘 안 될 시절이었어. 별로 유명하지도 않았고. 다른 곳에 비해 이렇다 할 변변한 것 하나가 없는 때였지. 계약금을 못 받아서 직원들이 각목이며 쇠파이프를 들고 단체로 몰려가 농성을 하기도 했고, 식당에 밥을 할 사람 구할 돈이 없어서 조지의 처가 직접 밥을 하기도 했고. 그런 회사니 인재도 돈도 좀처럼 모이질 않아 조지가 술이며 담배를 개망나니처럼 해대던, 뭐, 그런 때가 그 시절이었어. 조지가 사람이 좋고 호쾌해서 그나마 회사가 굴러갈 수 있었지. 속된 말로 조지 얼굴 뜯어먹으면서 버티던 회사였어.”
 “그렇군요.”
 제제는 사람이 좋고 호쾌한, 술을 퍼먹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조지 회장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가 알기로 조지는 괴팍하고, 냉랭하고, 담배는 일절 피우지 않고,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술도 하지 않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런 제제의 곤란함을 눈치챈 모모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날도 하루 이틀이지, 더는 미래가 없어 보여서 거의 가장 처음부터 함께 일한 나도 회사를 떠나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어. 장남이고. 자식도 다섯이나 됐고. 그래서 하루는 조지와 술을 먹다가 말했지. ‘조지, 다른 회사를 알아봐야겠어. 집에 입이 늘고 있어.’ 그러자 조지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더군. 꽤 오랜 시간. 아마도 십 분. 그가 나를 빤히 쳐다봤어. 그 눈빛이 너무 무서워서 그가 나를 칼로 찌를 줄 알았지 뭐야.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는 술값을 계산하고 난 뒤 가게를 나섰어. 뒷모습이 유난히 쓸쓸해 보여서 나도 마음이 안 좋은 상태로 집에 돌아갔고. 그런데 그날 새벽에 전화가 왔어. 조지의 처였는데, 굉장히 다급한 목소리였어. 조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거야! 그 순간 식당을 나서며 날 돌아보던 조지의 눈빛이 떠올라 맨발로 온 동네를 뒤졌고, 동이 틀 때까지 그의 이름을 외치며 그를 찾아다녔지. 나쁜 마음을 먹은 건 아닐지, 높은 건물이나 강가도 돌아다니며 그를 찾아보았고.”
 “찾으셨나요?”
 “못 찾았어. 일주일동안. 사람이 증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어.”
 무던하고 말수가 적은 제제도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조지가 일주일동안 실종된 일이 있었다고는 그 누구로부터도 듣지 못했다. 그게 오히려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회사 내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자문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이 그룹 내에서 그는, 회장을 보좌하는 자리, 그러니까, 나름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사실 그에게 주어진 것, 다시 말해 그에게 허용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가장 높은 사람의 오른팔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또는 알지 못한 것을 알게 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화학적 반응이었다.
 그는 목 마른 사람처럼 뒷이야기를 갈구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뒤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조지는···”
 모모가 조심스럽게 장면과 언어를 추려내는 사이에 사무실의 전화기가 울렸다. 모모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의 상대에게 그는 격의 없는 존중을 담아 털털한 말투로 대화를 나누었다. 모모는 그 상대가 누구일까 추측해보았다. 아마도 조지 회장일 것이다. 일하라고 보낸 놈이 왜 돌아오지를 않는 건가, 하고 연락했을 것이다. 모모 이사와 너무 오래 사담을 나눈 나머지 다른 업무에 지장이 생겼을 것이다. 약 삼십 초 길이의 전화를 마친 모모는 조지가 제제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제제는 그에게 인사를 한 뒤에 정신 없이 자신의 자리로 달려갔다.

 제제는 밀린 일에 대한 각별한 공포를 느꼈다.
 밀린 일의 양만큼 중심으로부터 밀려날 것이다.
 그런데 ‘악마’는 대체 무슨 말이지?

 “제제.”
 어디선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 조지가 제제에게 말했다. 제제는 그제서야 밤늦도록 자신이 아무것도 없는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빤히 바라보면서, 모모가 한 말들을, 폐쇄적으로, 끊임 없이 곱씹고 있었다. 그것은 업무상 금기다. 다른 누가 말해준 금기가 아니다. 제제가 스스로 세우고 지켜온 금기다.
 “예, 회장님.”
 “준비한 술은 어디있지?”
 “죄송합니다. 잔무가 많아서 준비할 틈이 없었습니다.”
 “오늘따라 답지 않군. 귀신이라도 씌었나?”
 조지가 제제를 타박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그 말이 맞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업무에 집중하여 잔무라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시에 술과 안주를 미리 주문하고 정시에 도착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갖췄을 것이다. 재계의 최선두를 달리는 그룹의 총수를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이라면 그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정말로, 귀신, 모모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마, 가, 혼을 뺏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악마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름을 외는 것 만으로도 사람을 홀리는 권능을 지닌 존재. 아니면 다른 누구도 아닌 모모 이사가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는, 그저, 오늘이 날이 아닌 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제는 ‘몰랐다’.
 “죄송합니다.”
 황망한 마음이 진심으로 묻어나오는 말투에 조지는 더 별 말 하지 않았다.
 “요새도 빨간 뚜껑이 달린 술이 나오나?”
 “도수가 21도인 것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렇습니다.”
 “편의점 가면 팔지?”
 “네.”
 “1층에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사원 복지용이라 지금은 영업이 끝났을겁니다. 하지만 다른 곳들이 많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은 걸어서 1분 안에 갈 수 있습니다.”
 “가지.”
 조지는 별 말 없이 비서실을 나섰다. 제제는 황급히 그를 따라갔다. 노인의 느린 보폭을 맞추며 걷다보니 평소보다도 밤바람이 제법 차갑고 오싹하게 느껴졌다. 그는 말 그대로 ‘발에 땀이 나게 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편의점에 들어선 조지는 제제에게 바구니 두 개를 들도록 했다. 하나에는 그가 말한 ‘빨간 뚜껑이 달린 술’을, 다른 하나에는 편의점에서 파는 먹거리들을 가득 담았다. 집 앞 편의점에도 들른 일이 없던 조지는 간편 식품들을 고르는 데에 재미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음식들의 성분과 가격을 유심히 살폈다. 그렇게 고른 음식의 양이 한가득이었다. 제제는 급히 경비실에서 직원 한 명을 불러와야만 했다. 조지는 짐을 든 경비와 제제를 데리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것들을 만든단 말이지?”
 조지는 돼지고기 다짐육으로 만든 간편식을 오물오물 씹으며 제제에게 말했다. 제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목이 빠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습니다.”
 그의 발음은 정확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 주량을 넘긴지 오래였다. 그들이 편의점에서 산 술은 이제 두 병밖에 남지 않았다. 마신 술의 양을 역산한 제제는 회장과 자신이 각자 다섯 병도 넘게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벽 네 시였다.
 ‘연차를 써야겠군.’
 “맛은 없는데, 더럽게 비싸네! 옛날에 이런 고기는 시장에서 오백 원만 주면 사 먹을 수 있었어. 가격을 좀 조정하던가, 품질을 높여야겠군.”
 “계열사 기획 부서에서 맞춰놓은 마진 값이 있을텐데요?”
 “이 사람아, 식품 회사에서 식품이라고 파는 걸 이렇게 해서야 되겠나? 이렇게 팔면 아무도 안 사 먹어! 누가 이런 쓰레기 고기를 사 먹을 생각을 하겠냐구.”
 “이건 식품이 아니라 제품입니다, 회장님.”
 “뭐라구?”
 술에 취해 목을 가누지도 못하는 제제는 조지의 시선이 자신에게 메다 꽂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차 싶어 고개를 들었다. 조지는 자신의 말에 이의가 제기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제제는 자신이 조지의 성질을 돋군 것은 아닐지 걱정했다. 그런데 조지는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다. 그런 면상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게 했다.
 “자네, 뭐라고 했나?”
 “이건 식품이 아니라 제품입니다, 회장님. 아무도 편의점에서 식품을 사 먹을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식품을 어디서 사먹지? 우리는 식품 쪽은 취급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
 “우리 그룹이 돈을 벌지 못하는 어디에선가 사 먹겠죠. 지옥의 불구덩이라던가.”
 조지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서조차 제제는 조지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 말에는 부연 설명이 필요해.”
 제제는 그 말에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이미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스스로도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것은 필요에 의해서, 그러니까, 오디오를 채우기 위해서 나오는 기계적인 발성이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만 조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옥의 불구덩이는, 이를테면, 저···, 은어입니다. 그러니까, 요새 유행하는, 그런···”
 “술에 취했군! 벌로 한 잔 더 마시게.”
 짖궂은, 그러나 그것보다는 조금 더 나아간 어떤 표정으로 조지는 탁자에 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집무를 보는 큰 책상으로 나아갔다. 그 밑에서, 아마 서랍 또는 금고로 추정되는 공간에서, 그는 무언가를 꺼내왔다. 제제는 고개에 힘을 주어 그것을 바라보고자 했다. 그것은 와인이었다. 어떤 라벨도 붙어 있지 않은 와인이었다. 먼지가 조금 끼었다.
 ‘더 마시겠다고? 이 영감쟁이, 나보다 더 많이 마시지 않았나?’
 “은어는 무슨. 모모가 자네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고 들었네.”
 “모모 이사님께서, 회사 초창기에 회장님께서 일주일 동안 실종된 적이 있었다는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악마 얘기도 했고.”
 “그렇습니다.”
 제제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마침내 조지에게 질문했다.
 “악마 얘기는 농담이죠?”
 그러자 조지는 물쩡한 웃음을 지었다. 와인을 따른 잔을 제제에게 건네며 그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제제는 감히 눈을 마주하지 않고 빠르게 시선을 회피했다. 다만 그는 잔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언뜻 스치는 조지의 손이 꽤 차가웠다. 노인의 몸은 온기를 점차 잃어간다(술을 그렇게나 마시고도?).
 “자네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가?”
 “네.”
 “그게 자네 일이 아니더라도?”
 “제 업무는 회장님의 일을 알고 돕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제 일이 아니라고도 볼 수 없습니다.”
 조지는 박장대소했다. 그것은 약간 도취적이었다.
 “편의점 고기는 식품이 아니라 제품이라고 하는 사람이 일주일 간의 실종은 내 일이 아니라 자기 일이라고 하다니. 내가 참 재미있는 사람을 비서로 뒀군!”
 “정확한 판단보다는 빠른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이 잘못됐다면 빨리 시정하겠습니다.”
 흐물흐물하게 웃으며, 조지는 흐물흐물하게 잔을 댔다. 제제는 빠르게, 예의 있게 잔을 조심히 부딪혔다. 와인은 진한 피 맛이 났다. 제제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종류의 와인이었다. 정확히는 맛 자체는 친숙한데, 그 정체를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맛이었다. 설명이 필요했다.
 “그런 태도가 좋아서 그동안 자네를 비서실에 계속 두고 있었지.”
 “감사합니다.”
 “그러면 문제를 하나 내보겠네.”
 “예.”
 “답은 없어.”
 조지는 자신과 제제의 빈 잔에 와인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악마가···, 아니, 신이···, 아니, 산신령···, 아니, 뭐, 뭐가 됐든, 자네와 거래를 하자고 제안을 했네. 자네가 원하는 무엇이든 자네에게 주겠다는 제안이야. 그게 돈이 됐든, 명예가 됐든, 권력이 됐든, 여자가 됐든, 아니면 신 자신의 자리가 됐든. 말 그대로 상상력이 가닿는 만큼의 그 무엇이라고 원한다면 자네에게 주겠다고 제안을 해. 참 좋은 제안 아닌가?”
 “그렇게 좋은 제안이라면 독소 조항이 있을텐데요.”
 “있지. 당연히 있지. 당연히.”
 와인을 따르는 조지의 손이 멈추지 않는다. 잔이 끝 없이 와인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병의 입구를 타고 흘러내리는 와인의 소리가 상류의 빠른 물결처럼 거세다.
 “자네가 줘야 할 것은 하나뿐이야. 단 하나.”
 “그게 뭐죠?”
 “몰라.”
 “네?”
 와인의 소리는 폭포처럼 강하다. 귀를 때리고 전정 기관을 뒤흔든다. 어지럽다. 제제는 자신이 단지 취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잔은 아직도 채워지지 않았다.
 “자네는 그가 자네로부터 무엇을 가져가는지 전혀 알 수 없어. 자네가 그로부터 원하는 뭐든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그도 자네로부터 원하는 무엇이든 가져갈 수 있지. 하나씩. 단 하나만을 가져가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자네를 안심시킨다네. 자네가 아무리 큰 것을 원하든 그는 자네로부터 오직 하나만을 가져간다네. 어찌 보면 꽤 소박한 독소조항이지.”
 “하지만 ‘알지 못한다’는 것은 참 난감한 상황인데요. 그건, 제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가 저한테서 무엇을 가져갔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제가 조금만 노력하면 알 수는 있는 종류의 상황인가요?”
 “몰라. 난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그런 건 안 물어봤지.”
 “물어보셨다는 건···”
 “제제는 공부를 많이 해서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까 그 때가 되면 꼭 그걸 물어보길 바라. 그나저나, 그런 조건이라면, 어때? 거래를 받아들이겠어?”
 제제를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딱히 이렇다 할 것이 떠오르진 않았다. 제제는 현실적인 사람이다. 사업 상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적절한 행동을 하는 것에는 나름 자신이 있지만서도, 공상의, 어쩌면 공상이 아닐 수도 있는, 어떤 조건을 따지고 판단하는 것에는 아무래도 집중력이 가닿지 않았다.
 “저라면 거래를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걸 만약 사업에 대입한다면, 선취한 이득에 장래적으로 어떤 위험 요소가 발생할지 전혀 알 수 없는 시장에 뛰어들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렇지. 그렇게 생각했어야 했어.”
 조지의 목소리가 침울해졌다. 그의 몸에서 힘이 추욱 빠졌다. 병을 잡던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그는 병을 놓쳤다. 병은 깨졌다. 와인은 그들을 빠뜨려 죽일 기세로 샘솟고 있었다.
 제제는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조지는 웅얼거렸다.
 “하지만, 그러면, 나는 내 가족을 어떻게 먹여 살렸어야 했을까···”
 와인은 구두까지, 발목까지, 아니 무릎까지 차올랐다. 그것은 분명 입을 댔을 땐 시원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사람의 체온을 갖고 그를 잠식했다. 제제는 참을성을 잃고 마침내 조지에게 질문했다.
 “거래를 하셨군요? 악마와.”
 “그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조지는 강가에 서있었다. 회사에서 집으로 가는 길목. 을씨년스러운 어둠이 깔렸다. 추웠다. 하지만 바람을 피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눈 앞에 보이는, 사실 보이지도 않는, 강한 흐름에 인간의 형체를 포기하고 합류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되는데도. 집구석에 입이 몇 개나 되는데도. 전쟁통에 쑥밭이 된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하는데도. 새 시대를 일구어야만 하는데도. 은행에 대출금을 상환해야 하는데도. 혼란함들의 끝에서 새로 무언가를 세워야 하는데도. 그냥,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픈 마음이 자라났다. 모래성을 쌓아올리는데, 손에 모래를 담아 쌓아 올리려 하면, 손에서 모래가 듬성듬성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모모가 그를 떠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다른 회사로 옮기려 한다. 달리 말하면, 그는 조지가 돈을 좀 더 많이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떠나려 한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총알이 빗발치던 전선에서 서로의 등 뒤를 맡기고 함께 싸운 전우는 이제 돈 때문에 등을 돌린다. 등을 돌린다는 표현은 사실 부당하다. 모모에게도 가족이 있으니. 그러나 조지에겐 그런 사실보다는 당장 실감하는 감각들이 더 중요했다. 그의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그를 사로잡고 뒤흔드는 것은, 부당함에 대한 감각, 다시 말해 반작용이 발생하지 않는 작용에 운명을 맡겨야만 한다는 테제에 대한 실감이었다. 그런 경험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아니, 한 번 있다. 딱 한 번. 전투 중 거의 코앞에 떨어져 터진 폭탄의 충격 때문에 수 미터, 수십 미터를 날아간 적이 있었다. 체감하기로 공중에 몇 초는 떠있었다. 온 몸을 허우적거려도 움직이지 않는 순간이었다. 그 전투에서 아군은 패배했다. 지금 그는 그런 감각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폭탄을 맞고 수백 수천 미터를 날라가버리는 패잔병의 허우적거림. 아무리 노력해도 손에 돈도, 명예도, 권력도 잡히지 않는 현실을 그는 그저 입 다물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럴 바엔, 그럴 바엔···. 하고 되뇌이며 그는 강가로 걸어왔다.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이 그것 외에는 없었다. 최소한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할 일은 명백했다. 손에 움켜쥐고 있던 빨간 뚜껑이 달린 소주를 비우고 흐름 속에 몸을 맡기고 사라지는 것이 그가 할 일이었다. 하지만 쉬이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모든 것을 제쳐두고 이제 몸뚱이 하나만으로 자연과 대면하게 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그는 전쟁 이후로 오랜만에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 바로 그 나약함을 뚫고 그는 선택해야만 했다. 그가 움직이지 못하면 그가 대면한 자연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홀린 듯 물을 쳐다보는 조지의 심상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처음엔 그것이 결심인 줄 알았다. 이제 모든 준비가 되었다는. 모든 것을 버릴 용기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의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그의 앞에 나타난 상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조지였다. 차가운 강물을 거스르고 저 건너로부터 조지가 조지를 향해 건너오고 있었다. 조지는 깨달았다. 저것이다. 저것이 나의 모든 것을 시작했고, 나의 모든 것을 끝낼 것이다. 그가 나에게 생명을 시동하였다. 나의 생명이 시발하면서 그는 세상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나’라는 신성의 왕국이 세상에 유일하지 않다는 감각은 실로 섬뜩한 일이었다. 인간 본능에서 뻗어난 촉수였다. 그것이 조지를 휘감고, 억세게 힘을 주어, 꼼짝도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제 그것은, 그러니까, 조지는, 조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물 위를 걸으며. 약간 희미한 빛을 발산하며 조지는 조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조지는 끝없는 공포를 느꼈다. 무저갱의 추락을 느꼈다. 마침내 조지가 조지에게 가닿았을 때 조지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조지는 손을 맞잡았다. 언어가 맞닿은 살결을 따라 흘러들어왔다. 그제야 조지는 그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는 안 좋고, 형체가 없는, 하지만 만질 수 있는, 그러므로 닿을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그를 무저갱으로 끌어내리는 무언가였다. 그리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입을 떼지 않았다. 다만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칠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의사소통은 충분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 이 조지는 저 조지가 아니니까,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이 낳은 것이니까, 원하는 무엇이든 그는 그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세상의 억만금을 갖고 싶어. 나를 둘러싼 세계가 천지개벽을 할 만큼 많은 돈을 벌고 싶어. 처자식을 굶어죽게 하고 싶지도, 모모가 나를 떠나게 하고 싶지도 않아. 그것이 나라는 놈팽이가 가진 소망의 전부야. 그러자 그는 말했다. 나도 억만금만큼의 무언가를 갖고 싶어. 나는 너야. 그러니까 내가 욕심이 좀 많은 걸 이해해줄 수 있지? 그는 반문했다. 하지만 내겐 억만금이 없는데? 그러자 그가 말했다. 오, 걱정마. 억만금보다 더 귀한 무언가를 너는 갖고 있으니까. 그게 뭐지? 넌 모를 거야. 난 알고 싶어. 바로 그거야. 그게 무슨 말이지? 바로 그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바로 그거야. 조지는 조지와의 선문답에 지쳤다. 술기운도 떨어져가고,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더이상 뭔가를 말할 겨를이 없었다. 조지는 그것을 눈치채고 그에게 술을 한 잔 권했다. 그게 어디서 났는지 신경쓸 새도 없었다. 조지는 그것을 마셨다. 생전 처음 마셔보는 종류의 술이었다. 이게 뭐지? 포도로 만든 술이야. 다시 말해, 누군가의 살로 만든 피지. 네가 다 마셔. 그는 그에게 잔을 계속 따라주었다. 잔이 멈추질 않았다. 술이 병에서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이게 뭐야. 난 그만 마시고 싶어. 그럴 순 없어. 이게 바로 네가 바란 거야. 조지는 술을 뿌리쳤다. 병이 바닥에 떨어졌다. 박살이 났다. 와인은 끊임없이 샘솟았다. 와인은 구두까지, 발목까지, 아니 무릎까지 차올랐다. 그것은 분명 입에 댔을 땐 시원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사람의 체온을 갖고 그를 잠식했다. 그는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러나 사지가 밧줄로 묶였다. 그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그가 있는 곳을 살펴보았다. 양옆으로 조지처럼 묶여 뉘인 사람들이 있었다. 똑같은 생김새의 침대 위에 똑같은 생김새의 밧줄에 묶여 똑같이 머리가 밀렸다. 아주 공포스러웠다. 앞뒤로도 조지처럼 묶여 뉘인 사람들이 있었다. 침대. 밧줄. 빡빡 밀린 머리. 위아래로도. 그러니까, 사방이 묶인 사람들로 가득찼다. 그는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정신을 차린 이후로 수 시간, 수십 시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이었다. 작용도 반작용도 없는 곳에 홀로 덩그러니 놓인 것은. 혼자가 아님에도 혼자이기만 한 것은. 그는 숨을 쉬었다. 행동할 수 없는 인간은 느껴야 한다. 가슴이 올라갔다 내려가는 것을, 횡격막이 팽창하고 수축하는 것을, 공기가 들어차는 허파와 위가 터질 때까지 늘어나는 것을 느껴야만 한다. 그러면 사고가 희석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피를 타고 흐르던 수많은 물질들을 밀어내고 공기방울이 들어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현상은 하나의 흐름이, 물길이 되어 그를 한 가지 질문으로 인도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내 앞에 놓인 것은 무엇이지? 나는 어디로 가는 거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건 대체 뭐지? 그는 한 번에 하나씩 천천히 그러나 명징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그날 밤 강에서 마주한 것은 그에게 좋거나 나쁠 것이다. 그것이 만약 조지에게 좋은 것이라면 실제로 조지는 ‘억만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만약 조지에게 나쁜 것이라면 실제로 조지는 ‘무언가’를 빼앗길 것이다. 그날의 감각은 너무나도 생경하고도 섬세했으므로 그때의 거래가 결코 거짓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조지의 앞에 ‘억만금’이건 ‘무언가’이건 둘 중 하나 또는 모두가 놓였다면, 그는 전과 달라진 무언가가 되어야만 한다. 전에 없었던 무언가를 손에 쥐게 되었으므로 그는 전에 없었던 무언가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래성을 쌓기 위해 수만 번 손에 모래를 퍼담아도 그것이 모두 흘러내려 아무것도 쌓지 못하고 끝이 도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따라서, 그는 나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위인지, 아래인지, 앞인지, 뒤인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강가에서의 거래로 모든 것이 무너져내려버렸고 좌표는 사라져 더이상 위도, 아래도, 앞도, 뒤도, 오른쪽도, 왼쪽도 없어져버렸기 때문이다. 빛이 있으라. 그는 출장을 위해 들른 기차역 앞에서 미친 노인네가 부르짖던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그 말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는 몰라도 그 말이 참으로 적절하다고 느꼈다. 내가 나아가는 방향대로 모든 것이 성립할 것이다. 위도, 아래도, 그리고, 그리고···. 그런데, 그건 대체 뭐지? 그 순간 사고가 멈췄다. 그는 그것의 정체에 대해 단 한 문장도 기술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뱉을 수 있는 문장은 하나, 단 하나 뿐이었다. 조지가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으려는 순간 진짜로, 모든 것이, 무너져내려버렸다. 오른쪽과 왼쪽에 있던, 앞과 뒤에 있던, 위와 아래에 있던 침대와 사람과 빡빡 밀어버린 머리들이 무너져내렸다. 그의 머리에는 우악스럽게 두건이 씌워졌다. 잠시 사지에 해방감이 드는가 싶더니 이윽고 억센 팔들이 그를 잡아채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그는 발버둥쳤지만 그럴수록 힘이 더 세게 가해졌고, 마침내 그는 잠잠해졌다.

 공포가 도래했다.

 조지의 마침표에 제제는 정신을 차렸다. 와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회장님, 제가 방금 본 것이···”
 “무엇을 보았든 현실이네. 자네의.”
 “회장님께서 보신 것도, 그럼, 현실이군요.”
 “나의.”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제는 긴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여운에 침잠하여,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인상과 단어들의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그러다 그 사이로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평소대로라면 그것을 단어로 가공해서 빠르게 말로 내뱉었겠지만 지금은 그것이 쉽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게. 아마도 자네의 생각이 맞을테니까.”
 제제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까 회장님께서는 ‘거래’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그렇지.”
 “이 거래에서 회장님은 득을 보셨습니까?”
 “어떤 것같아, 자네가 보기엔?”
 “감히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용기가 없군!”
 조지가 질책하듯 말했다. 그러나 제제는 그것이 모종의 격려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말투에 진심으로 타박하는 마음이 담기지 않았다.
 “왜지?”
 “회장님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계시니까요. 회장님께서 보신 회장님 자신이 신이든, 악마든, 부처든, 마귀든, 신령이든, 귀신이든, 혹은, 그저, 실례가 될 수 있지만, 회장님께서 착란을 일으키셨든, 결국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자신의 손으로 토지를 일구어낸 사내만이 보일 뿐입니다. 그리고 아마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그럴 겁니다.”
 조지는 아무 말도 않고 제제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다 제제의 말이 끝난 다음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이 커서 얼굴을 다 덮고도 남았다. 그런 그의 손등은 쭈글쭈글했다. 그는 마른 세수를 했다.
 “그렇다면, 내가 만약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 거래에서 난 이득을 본 셈이 되겠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내 남은 삶은 너무나 짧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기에는 난 가진 것이 이제 없어.”
 “그런···”
 “동이 트는군.”

*

 대화를 끝낸 조지는 제제에게 악수를 청했다. 노인의 손에는 아직 힘이 넘쳐났다. 그러나 제제는 그 힘을 조지 자신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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