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문화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는 비혼과 저출산

한민 문화심리학자
한민 문화심리학자

2021년 대한민국의 합계출산율은 0.81명이었다. 가뜩이나 감소 추세였던 대한민국의 출산율은 2년째 지속되는 코로나19 때문에 다시 한번 아래쪽으로 꺾였다. 출산율을 올리기 위해 10여 년의 시간과 380조 원의 예산을 들였지만, 출산율은 올라갈 줄 모른다. 한국의 인구는 이미 데드크로스(Dead Cross)를 시작했다.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저출산은 이제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오랫동안 아이를 낳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류가 이 땅에 발을 디딘 이후로 계속돼 온, 아니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존재 이유가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로 전하는 것 아니던가. 해가 뜨고 지듯 당연한 이 일이 지금 벽에 부딪힌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저출산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세계의 인구가 지금처럼 늘어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수치로 보자면 1945년 25억 명을 넘지 않았던 세계의 인구는 2022년 현재 80억 명에 육박한다. 인구가 이렇게 폭증한 이유는 의학과 생명공학의 발달에서 찾을 수 있다. 영아 사망률의 감소, 질병 통제, 전쟁 등 거시적 위협의 감소로 일단 태어난 사람은 기대 수명까지 살아갈 확률이 높아졌고, 곡식의 품종 개량 등으로 부양 가능한 인구의 한계가 늘어난 것이다. 

이는 말 그대로 전례 없는 일이었다. 늘어나는 인구만큼 산업과 경제 규모도 커졌고 새로운 갈등과 문제가 나타났다. 경쟁의 심화도 대표적인 문제 중 하나다. 자원은 한정돼 있기에 경쟁이 심화될수록 개인은 불안해지고 지치며, 확보한 자원을 더욱 가치 있는 일에 쓰려 한다. 생물학의 ‘생활사 전략’이라는 개념에 따르면,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에 사는 생물(사람)은 일찍 결혼해 후손도 많이 두고, 현재에 초점을 둬 자신이나 자녀의 미래에 크게 투자하지 않는다. 반면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 사는 사람은 미래, 자기계발, 장기적 관계를 중요시하며 자녀도 적게 낳는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의 인구밀도는 몇몇 도시국가를 빼고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어린이집부터 시작돼 은퇴 후에도 안심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경쟁 수준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출산율 감소와 비혼은 자연스럽다. 문화란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이니만큼, 아이를 낳지 않는 현재의 흐름 역시 살아남기 위한 한국인의 노력이다. 

 

그렇다면 출산율이 자연히 회복될 때까지 그저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 시간에 맡기기에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소요될지도 알 수 없거니와 그때까지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할 비용이 너무 크다. 그리고 결국 그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것은 한국인이다. 해당 비용은 결혼 여부 및 자녀의 유무와 관계없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여겨볼 지표가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저출산의 터널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게 하는 이 지표는 바로 ‘결혼한 부부의 출산율’이다. 결혼 부부의 출산율 2.23명은 합계출산율 0.81명을 꽤 상회하는 수치다. 일단 결혼을 하면 자녀를 두 명 이상 낳는다는 뜻이다. 내 아이를 경쟁으로 내몰고 싶지 않아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상식과 다소 차이가 있다. 두 명씩 아이를 낳는 부부는 자신들의 아이를 한국의 끔찍한 무한 경쟁에 내몰려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이가 그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정도로 투자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것일까? 

모든 부부가 아이가 성공할 때까지 지원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것은 아니다. 우리 집만 해도 그렇다. 아이에게 부모가 할 수 있는 지원은 해 줘야겠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수는 없다. 부모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이를 낳은 이유는 아이와 함께 살아갈 날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지, 내 모든 걸 희생해서 자식을 성공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쯤에서 상황을 보는 시각을 바꿔 볼 필요가 있다. 출산율이 낮은 이유는 아이를 낳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결혼하지 않는 데 있다. 한국에서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일단 다시 경제적 문제로 귀결된다. 결혼한 부부가 독립하려면 집이 필요한데, 천정부지로 치솟아 버린 집값과 날로 좁아지는 취업 시장은 내 집 마련의 꿈을 불가능하다고 느끼게 한다. 따라서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가 집값에 있다면,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정책도 출산 후 지원보다는 신혼부부의 내 집 마련과 관련한 쪽으로 집중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비혼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들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려받을 재산도 있고 본인도 충분히 버는, 심지어 자기 집이 있는 사람도 비혼의 삶을 선택한 이들이 많다. 여기에는 문화의 변화가 이유로 꼽힌다. 인간 사회가 결혼과 출산을 권장해 온 이유는 생존에 있다. 인간은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집단을 이뤄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단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머릿수가 가장 중요하다. 농사를 짓든, 사냥을 하든, 전쟁을 하든, 머릿수에는 당해 낼 도리가 없다. 그리고 집단을 이루고 머릿수를 늘리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결혼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집단에 덜 의존하게 되면서 결혼과 출산에 관한 전통적인 생각은 재평가의 국면을 맞이했다. ‘집단의 결합’이라는 의미가 강했던 결혼은 개인 간의 약속으로, 인구의 유지와 증가를 책임졌던 출산 역시 부부의 선택에 맡겨졌다.

이런 추세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다. 비혼 인구의 증가와 함께 각국의 출산율 역시 베이비붐 세대 이후로 지속적인 하향곡선을 그려왔다. 그러나 한국의 비혼·저출산은 세계적으로도 특출나다. 도시국가 한두 개를 제외하면 한국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인구가 줄어가는 나라가 없다. 더 구체적인 이유를 찾아야만 한다. 

결혼, 출산, 육아에는 심층적인 인간의 욕구가 내재돼 있다. 친애의 욕구와 애정의 욕구가 그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려면 다른 이들의 존재가 필요하다. 생존과 안전이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애착과 사랑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다. 내 모습을 닮은 아이를 낳고 키우고 싶은 것은 포유류의 본능이기도 하다. 초저출산 시대임에도 〈아빠! 어디가?〉와 〈슈퍼맨이 돌아왔다〉 부류의 육아 프로그램이 만연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다는 욕구가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입으로는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탄식을 내뱉게 하지만, 결국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 같은 프로그램의 본질도 육아 욕구의 대리 충족에 있다. 

이런 인간의 근본적 욕구마저 뒤로해야 하는 데는, 그리고 한국에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는 데는 더욱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비혼의 이유가 한국의 한 세대 전 부모-자녀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결혼·출산·육아는 이성 관계에서 비롯되며, 이성 관계에 대한 생각은 부모와의 관계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성인기의 이성 관계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영향을 받는다. 이른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어떻게 경험하고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자신과 배우자와의 관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남근기(4~7세)의 아이들은 이성 부모(남자아이는 엄마, 여자아이는 아빠)에게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그 사랑은 동성 부모(남자아이는 아빠, 여자아이는 엄마)의 존재 때문에 좌절된다. 엄마와 아빠는 이미 서로 결혼한 사이인 데다가, 그들은 아이보다 키도 크고 아는 것도 많고 힘도 세기에 억지로 빼앗을 수도 없다. 아이는 동성 부모를 극복하려 하지만 동시에 공포(거세 공포)를 느끼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과의 동일시를 선택한다는 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골자다. 조금 풀어 말하자면, 남근기의 남자아이가 엄마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하거나(여자아이가 아빠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하거나), 아빠에게 질투를 느끼고 아빠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동일시)을 먹지 않으면(여자아이가 엄마에게 질투를 느끼고 엄마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을 먹지 않으면) 성인기의 이성 관계에는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한국의 가족은 수많은 난관을 겪었다. 구한말 이래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가족이 죽고 끌려가거나 하루아침에 땅과 재산을 빼앗기고 거리로 나앉는 일이 흔했다. 문자 그대로 부모·형제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었고, 전쟁 후에는 말 한마디 잘못해서 멀쩡한 사람이 끌려가 죽거나 병신이 되는 시기를 보냈으며, 그 와중에 잘살아 보겠다고 갔던 공장에서 타국의 전쟁으로 인해 생때같은 목숨과 팔다리를 잃는 가족들을 봐 왔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외환위기를 맞은 가족이 야반도주하거나 가장을 떠나보낸 집들이 널렸었고, 그 후유증은 비정규직의 만연과 만성적인 고용 불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당장 내 가족만 해도 할아버지께서는 일제강점기 징용에 끌려가셨고, 증조부와 외할아버지는 인민재판을 겪으셨으며, 월남전에 참전하셨던 이모부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고, 장인어른은 외환위기 때 명예퇴직을 당하신 분이다. 

반세기, 아니 거의 한 세기 동안 한국의 가정에는 부모 잃은 자식의 울음소리와 남편 잃은 아내의 눈물,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한숨이 그칠 날이 없었다. 물론 우리의 부모님들은 최선을 다해 자식을 돌보고 가르쳤지만, 가정의 분위기까지 따질 형편은 못됐다. 아들이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아빠에게 선망과 질투를 동시에 느끼는, 딸이 아빠 무릎에 앉아 엄마에게 밉지 않은 투정을 부리는 그런 분위기 말이다. 

부모는 시대가 준 한과 원망 때문에 늘 우울했고 짜증이 나 있었다. 성 평등과는 거리가 있었던 시대였기에 좌절과 분노는 배우자를 향하기 쉬웠다. 좁은 골목에는 부부 싸움 하는 소리, 살림살이 깨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당연하게 자식에게 그 화살이 꽂히는 일도 많았다. TV는 그 시절을 힘들었지만 따뜻했고, 어려웠지만 정이 있었던 시절로 묘사하지만, 기억이란 미화되기 쉬운 법이다. 

농경시대의 전통적 가치관이 남아 있었던 1970년대쯤까지는 결혼하고 자식 낳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자 본격적으로 흐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모하며 부모 봉양이나 제사와 같은 전통적 가치관과 현실이 부딪치는 등 새로운 불화의 씨앗이 싹을 틔웠다. 필자는 아직도 장손인 아버지가 제사를 그만 지내기로 선포했을 때의 냉랭한 집안 분위기를 기억한다. 

그중에서도 아이들의 이성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가족 내 성 역할 변화일 것이다. 특히 여성들의 학력은 높아졌으나 사회진출의 기회는 많지 않았던 1980년대에 대학까지 나온 여성들의 선택지는 적당한 곳에 취업해 별로 비중 없는 일을 하다가, 결혼하면서 일을 그만두고 주부로 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자녀, 특히 딸은 엄마의 삶에서 자신의 삶을 그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자식을 돌보는 주부로 살아가는 엄마를 보며 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좌절된 욕구는 부정적 연쇄를 낳는다. 부모의 부정적 감정이나 갈등은 자녀의 불안이 되고 부모의 불안한 결혼과 삶을 지켜본 아이들이 결혼을 원할 가능성은 적다.

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과거 한국은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 남성 중심 사회라는 의미는 남성에게 많은 권한이 주어지지만, 그에 따른 막대한 책임 또한 요구된다는 것이다. 과거의 남성은 자신의 권한으로 그 책임을 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뀐 현재에 많은 가치관이 바뀌고 있지만, 문화의 변화가 개인 수준까지 반영되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남성에게 주어졌던 권한들은 사라져 가지만 요구되는 책임은 아직 적지 않게 남아 있는 상황에서 결혼은 남자들에게 지나치게 버거운 짐이다. 결국, 아들들은 무거운 가장의 책임감으로 허덕이는 아빠를 보며 ‘나는 아빠처럼 살지 않겠다’라는 다짐을, 딸들은 자신을 잃어버린 채 주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엄마를 보며 ‘나는 엄마처럼 되지 않겠다’라는 다짐을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다짐들이 우리 사회의 비혼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지금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일은 아빠처럼 살고 싶은 아들, 엄마처럼 살고 싶은 딸을 키워내는 것이다. 집값도 잡아야 하고 공정한 사회도 만들어야 하겠지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변화는 가정에서 시작돼야 한다. 우리의 가정은 그동안 너무도 많은 아픔을 겪었고 시대를 살아내느라 서로를 보듬어 주지 못했다. 이는 단지 비혼과 저출산의 해결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더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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