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 농생대  교수ㆍ농경제사회학부

나는 낭만을 사랑하였다. 70년대 털털거리는 시외버스에 매달려 농촌실습을 나가면서, 그야말로 마당에 송아지가 뛰노는 주막집 허름한 툇마루에 걸터앉아 다 찌그러진 양재기에 막걸리를 들이키면서, 신림극장 옆 소줏집에서 되지도 않는 토론을 벌여가면서,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면서까지 낭만을 사랑하였다. 

그것은 낭만이 오직 우리가 얼마나 진실한 마음을 가졌느냐, 얼마나 순수한 정신을 가졌느냐 하는 것을 따질 뿐 우리 생각의 방향을 문제 삼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낭만을 통하여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이 서로의 열정을 존중하고 고통을 나눌 수 있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낭만의 열정을 숭배하면 게으르고 나태한 자를 경멸하게 될지언정, 생각이 다른 자를 미워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일은 없게 되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제와 새삼 선반에 올려놓았던 낭만을 끄집어내려 먼지를 터는 것은 옛날의 낭만이 다시 필요하게 될 것 같다는 조바심 때문이다. 그 때 운동하던 시절에 내가 낭만의 품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이제 이성의 시대가 오리라는 희망이었다. 투쟁의 세월이 가고 이해의 세월이 오리라는 믿음이었다. 어두운 날이 지나가고 밝은 이성의 시대가 오면 세상의 모든 더럽고 거짓된 것은 투쟁하여 청산하고 박멸하여야 할 대상에서 구제되어 이해되고 용서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낭만의 시절은 갔으되 이성의 시절은 좀처럼 오지 않을 것 같다. 낭만도 이성도 없다면 이 오해와 반목의 시절을 어찌 견딜 것인가? 

어렵더라도 이성에 몸을 던져 용납할 수 없는 것을 용납하는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이성을 통하면 잘못된 것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다. 이해와 포용이야말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지름길이다. 가장 큰 악은 이성을 통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악의 존재를 쉽게 인정하는 것이다. 악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어리석음은 악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더욱이 사람의 좁은 안목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악과 선의 경계를 가르는 것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과거에 호랑이에게 고통 받았다고 해서 호랑이를 징치할 수 있는 권리를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호랑이는 과거의 유물일 뿐 악한 존재도 선한 존재도 아니다. 호랑이가 사라진 세상에서 벌이는 호랑이 사냥은 오히려 악의 존재를 부각시켜 사람들을 미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한다. 이 땅에 다시 호랑이의 악이 부활되지 않게 하려면 호랑이를 사냥하기 보다는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게 하지 않고 미워하고 두려워하게 하는 교육과 정치는 옳지 않다. 

오지 않는 이성의 시대를 기다리며 되뇌인다. 또 어려운 시절이 온다면 다시 낭만의 힘으로 미움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나와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도 나와 똑같은 이성과 인간성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을까? 내 가슴이 잃어버린 낭만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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