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국(기계공학부 박사과정)
윤영국(기계공학부 박사과정)

“어렸을 때부터 평범한 것은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지. 나는 대용품이나 각주 같은 존재로 영원히 남는 것보다는 차라리 꽃, 과수원, 체스판, 오늘 너와 나누고 있는 이런 대화가 더 좋단다. 완전한 무명인(無名人) 상태에서 말이야!”

– 『Uncle Petros and Goldbach’s Conjecture』(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1992) 中 

글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양해를 구해야 할 것이, 우선 이 글의 정체를 밝히자면, 연구(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무언가)를 시작한 지 5년도 채 되지 않은 백면(白面) 연구원이 어찌어찌 연구하는 삶이라는 것에 대해 고찰한 것과 그 고찰이 더 나아가 삶의 방향성이 됐으면 하는 자그마한 소망, 그리고 독자 중 일부라도 같은 꿈을 꾸지는 않을까 하는 오만함이 모두 섞인 글이다. 이에 혹시라도 앞선 연구자들께 누(累)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우매한 후배의 졸견(拙見)이라고 생각하시어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를 감히 바라고자 한다.

몇 년 전 일이다. 동료와 논문에 관해 이야기하다가(사실 이야기라기보다는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투정을 부린 것 같다) 꽤 기억에 남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최고가 될 수는 없지만, 모두가 최고가 되려고 해야 한다.” 지당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연구라는 행위는 인류가 지금까지 싸워왔던, 그리고 현재도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광활한 지(知)와 무지(無知) 간 전장의 최전선에 서는 것인 만큼, 항상 현존하는 지식 너머의 것을 공세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어중간한 각오로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연구자는 항상 위대한 포부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 포부야말로 연구를 지속하게 할 수 있는 소중한 원동력이 돼 주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생각에는 흔들림이 없다. 다만 애석하게도, 연구를 진행해 나감에 따라, 그리고 그렇게 흘러간 시간에 비례해 스스로의 유한성(有限性)을 체험하는 동안, 종합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또 다른 생각이 피어나기는 했다.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최고가 되기를 목표로 삼아야 하는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의 자체에서부터 현재를 앞지른 시간상에 존재하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면, 현재와 그 목표 사이에 존재하는 유예된 시간의 무거운 하중을 끊임없이 견뎌야 하는데, 그럴 정도의 강인함은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니체가 신을 죽였다길래, 나 역시 니체를 한번 노려봤는데, 그 정도 근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없는 것이었다.

글을 쓰는 시점으로 돌아와서, 지금의 나를 스스로 톺아보자면, 천만다행으로 위대한 포부는 아직 건재하다. 처음부터 포기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을 정도로 연구라는 것의 가치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유예된 시간의 무게에 짓눌리지도 않는다. 사실, 애초에 이런 감상(感想)을 말하고자 글을 쓰는 것이기도 하다. 체력적 부담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휴식을 취해야 하고,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문제 해결의 중간 단계에서 멈출 수밖에 없는 현실에 어째서 불안을 느끼지 않느냐고 얘기한다면, 그런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에, 그 위에 차곡히 시간을 쌓을 수 있는 것이라고 답하고 싶다. ‘이미’ 치열했던 현실들이 위대한 포부를 구성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그 포부는 그제야 현실에 치열했다고 불릴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 그러니 내가 현실에서 좌절하는 것은, 충실히 살아낸 현실과 연구자로서의 이상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 한 좌절했다고 불릴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하트마 간디는 “영원히 살 것처럼 공부하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라”라고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충: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경구는 이미 너무나도 많지만, 미래의 항로를 개척해 나갈 존경하는 동료 연구자들에게 잠시나마 거울을 들이대 자신의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도 싶다. 또한 그레이엄 월러스가 말했듯이, 연구자에게는 부화(孵化)를 위한 시간이 얼마간 필요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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