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형 강사(서양사학과)
기계형 강사(서양사학과)

아침에 눈을 뜨면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을 확인하는 일상이 계속되고 있다. 러시아 역사 전공자로서의 관심 이전에, 개인적으로 우크라이나에 하나밖에 없는 젠더 박물관이 처한 어려움 때문에 더욱 마음이 쓰인다. 올해 2월부터 러시아의 공습과 포격으로 병원, 대학, 우체국 등 공공건물이 파괴되고 민간인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결국 나의 친구이자 젠더 박물관 관장인 타치아나 이사예바도 얼마 전에 우크라이나를 떠나 오스트리아에 사는 지인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는 그동안 봐 왔던 호탕한 웃음과 유머가 넘치는 그녀의 평소 모습과 너무나도 달랐다. 

우크라이나 젠더 박물관을 찾은 것은 2016년 여름이었다. 수도 키이우에서 5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인구 150만 명의 하르키우는 우크라이나 제2의 핵심 산업 도시다. 2016년 당시는 ‘유로마이단 혁명’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였다. 2013년 유럽연합과의 자유 협정 체결을 연기하는 법안을 야누코비치 정부가 의회에서 통과시키자 이를 반대하는 시민들의 시위로 유로마이단 혁명이 시작된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의 관계는 더욱 험악해졌다. 2014년에는 러시아가 크림지역에 대해 강제 병합을 시도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분리주의자들과 일체의 통상을 금지하면서 2016년에는 양국 관계가 단교의 위기로 치달았다. 당시 비행기 항로가 단절돼 나는 핀란드를 통해 키이우로 갔다가 하르키우로 어렵게 육로로 이동해야 했다. 

그러나 누가 아는가? 2004년 오렌지혁명에서부터 2013년 유로마이단 혁명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크림병합으로 온 세계의 눈과 귀가 우크라이나로 쏠려 있을 때, 여성들에 의해 젠더 박물관 건립이 준비됐고 마침내 건립됐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도 이 박물관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타치아나 이사예바 박물관장은 2008년 우크라이나에 최초로 젠더 박물관을 설립한 이후, 3,000회 이상의 전시회를 하면서 우크라이나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를 전시와 문화 운동을 통해 대변해 왔다. 그녀는 어디를 가든지 늘 전시 패널 몇 조각이라도 들고 다니며, 우크라이나 여성의 역사적 공헌과 우크라이나의 현실을 설명해 왔다. 소련 시대의 유물인 콤무날카 공동주택의 10평 남짓한 젠더 박물관에는 19세기와 20세기 우크라이나 여성의 유물과 사진을 비롯해 유대인 게토 지역의 제노사이드 기록에서부터 청소년에 대한 젠더 교육 자료와 젠더 정책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들였던 노력과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49° 59' 36.6" N, 36° 13' 49.3788" E.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내게 줬던 우크라이나 젠더 박물관의 물리적 공간의 좌표다. 그렇지만 타국에 피신해 있으면서도 그녀의 패기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박물관의 물리적 공간은 그녀에게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젠더 박물관과 우크라이나 여성들은 최고의 유목민들처럼 전시를 위해 언제나 어디로든 떠날 준비가 돼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타치아나 이사예바 관장은 내가 집행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국제여성박물관협회(IAWM)에 ‘전쟁에 관한 허스토리’ 프로젝트에 착수했다는 근황을 전해 왔다. 타지와 타국으로 피신한 피난민, 전시 상황에서 성폭력과 기아를 경험한 여성과 아동, 전투원으로 입대한 여성 군인, 그리고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수많은 여성 시민들의 인터뷰 작업에 착수했다는 소식이었다. 인터뷰 자료는 우크라이나 젠더 박물관의 중요한 콘텐츠이며, 이런 아카이브 수록 작업은 젠더 평등한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자는 호소다. 폐허 속에서도 우크라이나 젠더 박물관의 용기 있는 여성들이 희망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한국도 국립여성사박물관 신축을 앞두고 있다. 전국적으로 1,000여 개에 이르는 크고 작은 박물관들에 숫자 하나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의제와 함께하고 젠더 평등을 이루기 위한 창의적 박물관을 제시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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