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슬픔을 나누면 슬픈 사람이 둘이 될 뿐이라는 반박도 있다. 요즘에는 ‘감정 쓰레기통’이라는 말도 자주 쓰인다. 그 용어를 처음 들었을 때, 콕 집어 말하기 어려웠던 부분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것 같아 무릎을 탁 쳤다. 부정적인 감정의 토로나 일방적인 하소연이 반복되면, 듣는 이는 피로를 넘어 무력감까지 느끼게 된다. 누군가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취급하는 일도, 누군가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는 일도 경계해야 한다. 그런데 ‘감정 쓰레기통’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일상적으로 확대되면서 부지중에 누군가를 ‘감정 쓰레기통’처럼 대하는 것은 아닌지, 상대방이 ‘감정 쓰레기통’이 된 느낌을 받지나 않을지 과잉 검열할 때가 있다. 점점 혼자서만 고민과 상처, 감정을 감당하려 끙끙대다 보니 공감이나 소통, 연대와는 더 멀어지는 것 같다.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는 누군가의 아픔을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탁월하게 그려낸다. 어느 날,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는 ‘그녀’의 원룸에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후배가 살 곳이 없다며 찾아온다. 그 후배는 어린 시절 도서관에서 껌 한 통을 준 뒤 사라진 엄마에 대한, 그리고 그 이후부터 이별을 떠올릴 때마다 침이 고인다는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남은 껌을 반으로 쪼개 그녀에게 건네준다. 그 순간 그녀는 “왜, 왜, 그래?” “그러지마”라고 거부 반응을 보인다. 친한 사이에서도 부담스러울 법한 이야기와 행동을 하니 당혹스러울 만도 하다. 이후 후배와 소소한 일상의 재미를 나누며 함께 지내지만, 사소한 불만들이 쌓여 그녀는 혼자만의 시간을 그리워하게 되고, 결국 둘의 동거는 끝장난다. 다시 홀로 남아 후배의 사연이 담긴 반쪽짜리 껌을 씹는 그녀의 입에도 침이 고인다. 누군가의 아픔을 나누기엔 그녀의 삶 역시도 너무나 버거웠고, 그녀의 원룸은 타인과 나누기엔 너무나 비좁았는지 모른다. 

이제 박사과정 때부터 함께한 『대학신문』을 떠날 날이 다가온다. 『대학신문』에 몸담고 있다는 나름의 책임감에 매일 아침 기성 언론사의 기사들을 챙겨보는 버릇이 생겼는데, 버겁고 감정 소모가 커 아무 기사도 쳐다보고 싶지 않은 날도 있었다. 『침이 고인다』에서 “왜, 왜, 그래?”, “그러지마”라는 그녀의 반응처럼 필사적으로. 끔찍하고, 답답하고,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무력감을 확인하게 되는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대학신문』의 기사 가운데는 제법 가볍고 밝은 기사나 정보성 기사들도 많았지만, 전쟁·죽음·인권침해·구성원 간의 갈등을 다룬 기사부터 내밀한 고민과 감정이 담긴 기사들도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기자들의 고민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자의 취재 현장에는 함께하지 못하다 보니 그런 기사들을 그저 교열을 기다리는 원고 대하듯 하지는 않았나 되돌아본다. 오류가 없는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직업병 때문에 독자들은 알아채지도 못할 작은 것들만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았는지도 모른다. 정작 중요한 것은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나도 타인과 연결돼 있음을 느끼고, 우리의 취약함을 함께 나누는 것일 텐데 말이다. 

『침이 고인다』는 연대의 실패담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제 후배의 사연이 생각날 때마다 조건반사적으로 그녀의 입에도 침이 고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서로가 연결돼 아픔을 조금은 나누고 있는 것 아닐까. 슬픔을 나누면 조금은 줄어들지 않겠냐고 구태여 믿고 싶다. 간사로서는 개인적인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떠나지만, 『대학신문』의 열독자로 돌아가 타인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 기사들을 마음껏 읽고 싶다. 

유예현 간사

인포그래픽: 신윤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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