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진(사회학과 21)
신유진(사회학과 21)

덕질의 최종 진화 형태는 ‘직접 하기’라고 하던가. 봄 학기 내내 학교보다 극장에 더 열심히 출석 체크를 했던 내가 연극부에 들어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뭐든 한번 찍어 먹어 봐야만 속이 후련한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밴드를 쫓아다닐 때는 기타를 사고, 만화를 좋아할 때는 그림을 그리고, 춤을 배우고, 검도를 하고… 그다음이 연극이었던 것이니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거쳐 온 수많은 취미와 달리, 연극하기와 살아가기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은 가장 바쁘고 뜨겁던 여름방학 중에 찾아왔다.

근대 이전까지 자연의 모방을 최종 목표로 삼았던 모든 예술 분야와 다를 것 없이, 연극 역시 삶을 모방해 왔다. 인식하지도 못한 채, 거의 본능적으로, 인간은 삶의 구석구석을 무대로 옮겼다. 대표적인 상징적 상호작용론자 어빙 고프먼은 연극에 빗대어 삶을 설명했다. 사회는 무대다. 개인은 배우가 돼 역할을 만들고 이입한다. 자아는 연출과 연기의 결과물이다. 개인은 상호작용하는 대상과 상황에 맞게 다양한 가면을 쓴다. 동아리, 학회, 학과, 가족, 동창, 블로그, 카카오톡의 멀티프로필, 인스타그램, 또 공개 계정과 비공개 계정… 심지어 최근의 소셜 미디어는 ‘친한 친구 리스트’ 같은 기능을 제공하며 이를 권장하기까지 한다.

과장된 남자 흉내 혹은 여자 흉내를 내고, 가족을 사랑하는 청년 행세를 하다가, 되바라진 반항아가 되고, 교양 있는 귀족과 천박한 광대를 오가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이미 항상 하고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이 연극과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가 무대 뒤의 휴식 공간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항시 연기 상태인 배우들은 자연스럽게, 가장 마음에 드는 역할을 자신의 ‘진정한 자아’로 삼는다. 자신의 성격에 이름을 붙이고 어떤 고정된 순간의 모습을 전시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그 역할에 이입해 다른 역할을 비난한다. 사람은 입체적이라는 격언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학벌주의에 질린 자아는 과외 선생으로서의 자아를 비난하고 ‘쿨’해 보이고 싶은 자아는 이따금 ‘진지충’이 되는 자아를 비웃는다.

습관적으로 고결한 척 ‘진짜 나’를 낭만화하고, 현실의 욕망과 시대를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위악적인 자신을 꾸며 내 친절과 배려와 사랑과 비합리적인 모든 이상을 비웃기도 한다. 원망은 종종 자아를 넘어서 타인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개 이는 다시 자아를 향한다. 점점 더 많아지는, 이상하리만큼 타인을 미워하고 끌어내리려고 하는 사람들. 그들은 결국 자신의 어떤 부분을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금 이 세대는 가장 깊고 개인적인 곳에서부터 분열하고 있다.

연극 속에도 충돌하는 자아로 괴로워하는 주인공들이 있다. 그들은 극적으로 자신과 화해하거나 처절히 몰락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시원하게 무너져 내리는 비극적인 순간은 잘 찾아오지 않는다. 모든 치부와 비밀, 타인과 자신으로부터 숨겨 왔던 설정이 드러나는 순간은 잘 찾아오지 않는다. 여러 가면과 장막을 끌어안은 채, 내가 연기하는 배역이 몇 개나 있고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우리는 고단하게 살아가야 한다. 겹겹이 쌓인 가면을 벗을 수 있는 무대 뒤의 공간은 더욱더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가면을 벗는다고 ‘진정한 자아’, ‘진짜 나’ 따위의 것이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연출된 자아는 가짜가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슬픔과 혐오, 방황의 가장 깊은 곳에는 자신이 가장 진정한 삶의 모습이라고 우기며 다른 자아를 업신여기는 가면들이 있다. 그 모든 가면이 자신의 모습임을 받아들이고 무대 위의 고단한 삶을 충실히 살아가자.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모두 거짓이다. 그 모든 수치스러운 나의 모습도 나라는 것, 이것만큼 부끄럽고 안심되는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새로운 가면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행동하면, 그것도 새로운 나의 모습이 될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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