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원 사진부장
장재원 사진부장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죽음을 직접적으로 마주한 경험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진 나날이었다. ‘부재’를 이렇게 실감한 것은 처음이었다. 할아버지가 이 음식을 좋아하셨던가, 이런 날씨를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사소한 것을 물어볼 수 없는 게 부재구나.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상실감을 겪고 살아간다니, 놀랐다.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지 실감하면서 삶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먹먹해진다.

장례식을 겪으면서 느낀 것은 ‘돈’의 의미였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돈의 중요성을 느끼다니 나도 내 자신이 이상했다. 장례식을 치러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돈이 많이 든다. 영정 사진 옆에 꽃을 놓는 것도 크기에 따라 40만 원, 120만 원 더 많게는 1,000만 원까지 나간다. 시신을 운구하는 리무진도 따로 돈을 지불해야 이용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돈이 드는 장례식을 보니 돈 자체에 의문이 들었다. 사람들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최고라고 말하고 돈은 이런 가치 앞에서 힘을 잃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게 과연 가능할까? 사람은 죽고 나서도 돈이 든다. 돈이 얼마나 있는지에 따라 마지막 모습이 달라질 수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돈이 최고다’, ‘돈이 인간의 삶의 전부야’라는 극단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의 모든 순간에 돈은 빠질 수 없다는 현실을 말하고 싶다. 이렇게 의외의 순간에 돈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 

많은 사람이 죽음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살아 있는 채로 삶을 보낸 경험뿐이기에 경험해 보지 못한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피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죽음은 다가온다. 나에게도 다가오고 있고 내가 사랑한 모든 사람에게도 엄습한다. 우리는 이에 잘 대처하고 있는가?

화장장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구나’라고 느꼈다. 연령은 다양했다. 30대부터 80대까지의 사람들이 한 줌의 가루가 돼 가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에게 죽음은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다들 한 발짝 떨어진 채 죽음을 대한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결국 후회를 수반한다. 나 또한 그랬다. 할아버지가 건강해지셨으면 하는 나의 막연한 바람은 다가오는 죽음을 애써 무시하는 태도에서 비롯됐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바람은 아무런 힘이 없다. 내가 해야 했던 것은 실천이었다. 할아버지를 자주 찾아뵙는 등 많은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 한 일이 있나 생각해 보면 다시 자책하게 된다. 나의 의지란, 인간의 의지란 얼마나 나약한지 다시금 깨닫는다. 

사실 이 글은 할아버지를 배웅하며 느낀 점, 자책과 반성, 그리움의 글이다. 뻔한 말이지만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후회 없이 사랑하고 아껴주라고. 상투적인 말이지만 돌이켜 보니 이 말만큼 지키기 어려운 말이 없다. 그리고 이런 태도만큼 우리에게 필요한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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