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존과 개발의 갈림길에서

‘산등성이나 산비탈 따위의 높은 곳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라는 뜻의 달동네. 서울로 온 가난한 피란민과 농민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공간이었던 달동네가 소멸하고 있다. 관악구의 마지막 달동네로 알려진 밤골마을도 마찬가지다. 재개발 사업의 진전으로 밤골마을 주민의 대다수가 이주하면서 마을은 종지부만을 남겨두고 있다. 한편 서대문구 호박골마을은 재개발 대신 보존을 택하고 더 나은 삶을 향해 간다. 밤골과 호박골의 현재를 응시하며 서울 달동네의 마지막 장을 기록해 본다.

 

철거 앞둔 밤골, 생태공원을 꿈꾸다

관악구, 동작구, 성북구, 노원구, 서대문구 등 산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서울의 달동네는 19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친 소위 ‘재개발 붐’으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며 새로운 주거지가 조성됐다. 이런 재개발 물결 속, 2005년 서울시의 재정비촉진구역이 된 신림동 밤골마을에는 아직까지 옛 가옥이 남아 있다. 1980년대부터 밤골에 거주했던 장영우 재개발 조합장(74)은 “서울대 캠퍼스 이전으로 인해서 자하연 터부터 현재 서울대 대운동장과 정문 일대(일명 ‘자하동’)에 살던 주민들이 호암산 인근으로 이주했다”라며 밤골의 형성 배경을 설명했다.

2001년부터 밤골에도 재개발 논의가 시작됐다. 장영우 조합장은 “2000년도 초에 홍수가 나 10여 명이 사망한 일 이후로 거주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절감했다”라며 재개발이 추진된 배경을 밝혔다. 그는 “밤골마을 일대에는 생태 공원이 들어서고, 호암산 아래로는 2026년까지 1,500여 세대의 아파트 단지가 완공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수십 년 살아온 터전을 잃는 것에 대한 주민들의 아쉬움도 있다. 복작복작하던 밤골은 이웃 간 따뜻한 정이 오가는 마을이었다. 2010년대부터 지금까지 마을에 남아 있는 김태환 씨(68)는 “도시에서 고된 생활만 하던 내게 밤골에서의 시간은 소박하지만 따뜻한 전원생활이었다”라며 “마을 환경이 열악하기는 해도 붓꽃 심어 꽃밭을 만들고, 상추와 호박도 길러 먹고, 닭도 길렀었다”라고 회상했다. 세입자인 그에게도 밤골은 떠나고 싶지 않은 안식처였다.

김태환 씨가 밤골에서 추억 보따리를 풀고 있다.
김태환 씨가 밤골에서 추억 보따리를 풀고 있다.
이웃이 가져다 준 고구마 줄기를 다듬는 김태환 씨.
이웃이 가져다 준 고구마 줄기를 다듬는 김태환 씨.

밤골을 떠난 뒤 갈 곳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의 괴리도 있다. 세대주였던 주민들은 터전을 옮길 자금을 마련해 마을을 떠났지만, 세입자들은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마을에 남았다. 김태환 씨는 “이사 지원금 65만 원을 준다고 하는데 그 돈으로 어디를 갈 수 있을지 머리가 아프다”라고 토로했다. 이들에게 허락된 곳은 어디일까. 그는 “저렴한 반지하를 생각 중인데 최소 30만원인 월세가 부담스러워 최대한 밤골에 남고 싶다”라고 말했다. 가난의 상징이었던 달동네는 새로운 동네로 탈바꿈하고 있지만 이 사실이 곧 가난의 소멸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재개발과 보존이라는 갈림길 사이에 20년을 머무른 밤골은 올해 연말에 철거를 시작한다. 가난에 떠밀려 위로 올라가던 이들은 이제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중 하나인 밤골마저 사라져가는 지금, 달동네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천의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이보라 팀장은 “공간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을 넘어 달동네에서 펼쳐진 사람들의 삶 자체를 기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라며 아카이브 작업의 중요성을 전했다. 이 팀장은 “동영상과 구술 채록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거나 마을 문패를 보관하는 식의 물질적인 보존이 이뤄질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달동네는 아파트, 빌라 등과 달리 도시 빈민이 직접 개척해 나간 주거 형태이기에 달동네의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은 생활사 차원에서도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아카이브 작업은 역사 기록은 물론, 주민들이 달동네를 잘 떠나보낼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이보라 팀장은 “달동네의 소멸은 누군가에게는 고향의 상실”이라며 “달동네를 기억하는 작업은 원주민의 상실감을 어루만지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에너지 자립을 꿈꾸며 보존 택한 ‘호박골’

저녁이 되면 빛을 발하는 호박등의 모습. 호박등 너머로 새로 들어선 아파트가 보인다.
저녁이 되면 빛을 발하는 호박등의 모습. 호박등 너머로 새로 들어선 아파트가 보인다.

마을을 보전하되 변화를 통해 더 나은 삶을 모색한 달동네도 있다. 서대문구 홍은동에 위치한 호박골은 에너지 자립마을로 탈바꿈했다. 2012년 재개발 논의가 시작된 후 호박골 주민의 65%가 재개발 사업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 것이다. 호박골이 추구하는 ‘에너지 자립’이란 에너지를 친환경적으로 자체 생산해 마을 전체에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주민자치센터에서 호박골을 소개하는 이진원 대표.
주민자치센터에서 호박골을 소개하는 이진원 대표.

에너지 자립은 주민의 참여와 지자체의 지원으로 실현된다. 재개발을 거부하며 마을의 활로를 찾아 나선 사람들은 지금도 ‘마을 활동가’라는 이름으로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에너지 자립에 앞장선 마을 활동가들은 마을 곳곳에 다양한 태양광 시설과 빗물 활용 시설을 설치했다. 이 중 마을의 밤길을 밝혀주는 호박등은 태양광 발전기로 가동돼 연료비와 공해 문제에서 자유롭다. 지자체의 도움도 이들의 발걸음에 힘을 실었다. 행정안전부 지정 마을기업 ‘꽃피는호박골’ 이진원 대표(70)는 “재개발을 거부한 후 ‘마을을 살기 좋게 만들기’라는 숙제를 안고 마을의 문제를 고민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서울시 자원봉사센터의 도움을 받아서 2만 평 정도 되는 골목에 벽화를 그리고 화단을 가꿨다”라고 설명했다.

모인 빗물을 화단 가꾸기에 재사용하는 빗물저금통.
모인 빗물을 화단 가꾸기에 재사용하는 빗물저금통.

하지만 보존을 추구하는 길이 마냥 평탄하지는 않다. 홍은동 재개발 구역이 점차 확장되면서 호박골의 가구 수는 계속 줄고 있다. 이진원 씨는 “호박골 에너지 자립 마을은 초창기에 600여 가구가 함께 했지만, 지금은 200여 가구로 줄었다”라며 우려를 표했다. 그는 “주민들에게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을 공유하고 외지인도 참여할 수 있는 생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라고 말했다. 재개발이 아닌 보존을 택한 호박골이 다음 장을 써내려가기 위해서는 주민의 참여가 절실한 상황이다. 

 

밤골은 2022년을 끝으로 ‘마침표’를 찍고 새롭게 시작할 것이며 호박골은 자연 친화적 가치를 내세워 ‘쉼표’를 찍고 이야기를 이어나갈 것이다. 자하연 터에서 밀려난 이들이 이룩한 밤골을 잊지 않고, 쉼표를 찍은 호박골을 관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것은 어떨까. 더불어 밤골의 마침표가 찍히기까지 몇 가지 과제가 남았음을 기억하자. 남은 주민에게 강제집행 예고장이 날아오고 집행관이 방문하는 상황에서 생태공원으로의 꿈은 마냥 달콤할 수 없다. 모든 주민에게 ‘밤골 다음의 삶’이 분명해질 때 밤골이 저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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