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환(농생명공학부 산학협력교수)
김용환(농생명공학부 산학협력교수)

요즘엔 좀처럼 들어볼 수 없는 말이 돼 버렸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신문과 방송에서 ‘보릿고개’가 자주 언급됐다. 묵은 곡식은 떨어지고 햇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먹을 게 없던 어려운 때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었다. 수많은 국민이 보릿고개를 넘느라 고생했다. 그러다 1977년 쌀농사 대풍으로 쌀 자급률이 사상 처음으로 100%를 넘어서게 됐다. 이를 계기로 쌀 막걸리 제조가 허용됐다. 쌀 막걸리는 쌀 자급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보릿고개라는 단어는 그렇게 서서히 뇌리에서 사라져 갔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주곡 자립을 이루게 만든 1970년대의 녹색혁명은 서울대 농대 허문회 교수 연구팀이 개발한 다수확 품종 통일벼에서 출발한다. 이렇게 기존 기술과 산업의 한계를 허물고 세상을 바꾸는 기술을 ‘혁신적 파괴 기술’(disruptive technology)이라고 말한다. 20세기에는 공기에서 질소를 분리한 후 암모니아를 합성해 비료를 만들 수 있게 되면서 녹색혁명의 기반이 마련됐다. 그야말로 ‘공기에서 빵을 만드는’ 기술이 개발된 것이다. 이와 함께 종자 육종, 합성 농약 그리고 농업 기계화를 20세기 농업 분야의 혁신적 파괴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의 농업은 생산성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성 확보라는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온실가스 증가로 인한 지구 온난화의 영향에 농업만큼 노출된 산업도 없다. 농업의 정의도 재해석이 필요하다. 농지가 비농업인 자녀에게 상속돼 가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농업인만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원칙)은 ‘농지를 농업용으로만 사용한다’는 농지농용(農地農用)의 원칙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돼야 한다. 65세 이상 농업인의 비중이 50%가 넘는 현실을 놓고 볼 때, 2030년에는 과연 누가 농업에 종사할 것인가? 농업인과 토지와의 관계는 어떤 형태(소유, 임대 또는 관리)로 변화할 것인가? 생물 다양성, 생산성 및 온실가스 감축 측면에서 볼 때 지속 가능한 농업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스마트팜에서 일하는 사람은 농업인인가 전문직 종사자인가? 식물성 단백질과 세포 배양 고기와 경쟁하는 축산업은 온실가스 감축이라는 숙제와 함께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농업용 센서와 빅데이터로 농업인의 의사 결정을 돕는 디지털 솔루션은 농업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종자 육종의 핵심 기술인 유전자 편집 기술을 계속 과거의 법으로 규제할 것인가? 이처럼 우리는 농업인과 농업의 정의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2050년 지구 인구는 100억 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는데, 여기에 가뭄과 폭우, 폭염 등 기후 변화의 위기까지 더해져 더 적은 자원으로 더 많은 농산물을 생산해야 하는 농업의 과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인구 부양을 위해 2050년까지 지금보다 농산물 생산량을 50% 이상 늘려야 하지만, 이 까다로운 난제를 20세기 관점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세계경제포럼의 클라우스 슈밥 회장은 물리적, 생물학적 그리고 디지털 영역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4차 산업혁명의 특징으로 표현했다. 1990년에 시작된 최초의 인간 유전자 분석에는 10억 달러와 10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됐지만, 지금은 겨우 30시간에 단돈 천 달러 이내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벼 유전자 지도 완성도 마찬가지다. 

농업 분야의 4차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농·생명 분야의 ‘domain knowledge’(특정한 영역의 지식)와 ICBM*으로 요약되는 플랫폼 기술을 융복합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19세기 독일의 화학자이자 농화학자인 리비히는 식물의 생육은 공급되는 양분의 합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로 공급되는 양분에 의해 좌우된다는 ‘최소량의 법칙’을 발표했다. 농업은 디지털화가 가장 늦은 산업이었지만 디지털화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산업이다. 모든 구성 요소가 같이 발전해야 하는 ‘동시화’(synchronization)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ICBM (Internet of things, Cloud, Big data, Mob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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