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리 기자(취재부)
김미리 기자(취재부)

여름의 초입에 K와 캠퍼스를 거닐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K는 격양된 어조로 인터넷의 군중이 얼마나 확증 편향에 빠져있는지 말하며 “이래서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안 된다니까”라고 토로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다가 ‘무식한 사람의 신념’ 대목이 뇌리에 툭 걸렸다. K의 표정에서는 약간의 거만함이 느껴졌다. K는 자신이 ‘신념만 가진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는 전제를 가졌기에 위 문장을 빌려 타인을 힐난했으리라. 그러나 그 전제가 정당한지를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K는 신념을 가진 무식한 사람이 아니다’가 참이려면 다음의 두 가지 조건 중 적어도 하나를 충족해야 한다. K가 신념을 갖지 않았거나, K가 무식하지 않거나. 먼저 신념 부재의 조건부터 보자. 인간이 신념을 갖지 않는 것은 가능한가? 신념이란 다시 말해 삶의 가치 혹은 목적의식이다. 그런 신념이 부재한 상태는 무력감을 유발하는 개인적 불안정, 즉 아노미 상태다. 자아를 의탁할 그 어떤 신념도 갖지 못한 인간의 최후는 철저한 붕괴밖에 없을 것이다. 혹여 붕괴 전까지 신념이 없는 인간이 짧게나마 생존하더라도 이는 바람직한 상태일 수 없다. 그러므로 신념 부재의 조건은 충족하기 힘들다.

그럼 무식하지 않음의 조건을 보자. K라는 인간은 무식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 또한 ‘아니오’라고 답하고 싶다. 무식함에서 유식함 사이의 기준점을 설정하고 K의 지적 상태를 진단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어려운 논의다. 대신에 나는 모든 인간이 근원적으로 어느 정도는 무식하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먼저 무식하지 않음, 혹은 유식함은 무엇일까? 확고한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인간이 사유해 온 것 중 시대를 초월해 절대적으로 확고한 지식이 얼마나 있던가? 진리의 토대가 아예 없다는 회의주의적 주장을 제기하려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현실을 설명하는 지식들 가운데 상당수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가치’가 포함돼 있음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현대인이 혀를 차며 비판하는 조선 시대의 열녀 문화는 당대 가부장적 세계관의 지식들로 정당화된 결과물이다. 현대의 인간 중심적 담론도 미래 인공지능 시대에는 거짓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당신이 멍청하다고 비웃었던 인터넷 속 댓글이 언젠가는 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K는 유식한 사람이라면 꼿꼿하게 중립적인 위치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지식을 탐구해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사회, 경제, 문화적 조건에 따라 편향적 지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사회학자 칼 만하임은 지식의 존재 구속성을 얘기했다. 이는 모든 사람의 지식과 사회경제적 조건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다는 의미다. 만하임에 따르면 마르크스 등의 세계적인 사상가마저도 지식의 존재 구속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마르크스가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려 했던 것은 그 자신이 유대인이며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취약 계층이었던 프띠 부르주아 출신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K 또한 지식의 존재 구속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무식하지 않음의 조건 역시 충족하기 힘들다.

이상의 논의는 K 역시 신념을 가진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음을 보인다. 물론 K가 지적한 인터넷의 군중들에게는 확증 편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K의 주장에 일견 동의한다. 하지만 K가 본인이 인터넷 속 군중과 질적으로 다른 지적 존재라는 전제를 세운 것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친애하는 K의 거만함을 지적하려는 것은 아니나 그가 보다 성찰하는 태도를 지녔으면 한다. 우리 모두 인간의 근원적인 무지함을 인정하고 겸손한 태도로 신념을 가꿔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