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 한국 대중문화 속 ‘가난’의 모습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기생충〉, 〈오징어 게임〉에서 〈안나〉와 〈작은 아씨들〉까지, ‘가난’은 근래 최고의 흥행 보증 수표였다. 계급 불평등과 빈부의 양극화 문제를 통렬하게 고발했다는 찬사가 줄을 이었다. 〈기생충〉의 “반지하 냄새야”나 〈작은 아씨들〉의 “가난은 겨울옷으로 티가 나요” 등의 대사와 함께 해당 작품이 가난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묘사했는지 또한 화두에 올랐다. 누군가에게는 처절한 현실인 가난이 스크린에 적나라하게 전시됐고, 평단과 관객은 작품성을 찬양하며 전시된 가난을 즐겼다. 다소 가학적인 이런 풍경 안에, 가난은 과연 온전히 담겼을까.

 

폭력 없는 가난은 없나

스크린에서 가난은 ‘폭력’이라는 꼬리를 달고 재현된다. 〈오징어 게임〉의 데스 게임 참가자들은 456억 원의 상금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참가자를 배신하고, 짓밟고, 끝내 죽여 버린다. 비교적 현실적인 상황을 무대로 하는 〈작은 아씨들〉 속 인물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맏언니 ‘인주’는 희귀병에 걸린 동생 ‘인혜’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매를 맞아 돈을 번다. 둔탁한 파열음과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만큼 고통스러워하는 인주의 숨소리가 화면을 가득 메운다. 인주의 고통은 “네가 돈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라는 ‘수임’의 유희 거리다. 극적으로 연출된 상황에서 가난은 고통을 보여주기 위한 소재로 전락하고 만다.

더욱 문제인 지점은 작품 속에서 빈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마치 빈자의 자발적 선택이 가져온 결과인 것처럼 포장된다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 속 빈자는 게임의 규칙을 정확하게 인지하고도 제 발로 게임에 돌아온다. 〈작은 아씨들〉 속 인주는 맞을 때마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기꺼이 “고!”를 외치며 다음 매를 요청한다. 한송희 문화연구자는 “이런 연출 방식은 극 중 인물이 처한 상황의 구조적인 맥락을 삭제한다”라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빈자의 선택은 진퇴양난에 내몰린 결과다. 하지만 선택의 자발성이 강조되며 관객의 시선은 가난의 구조적 폭력성에서 멀어진다.

〈기생충〉의 ‘기택’네 가족과 〈안나〉 ‘유미’의 반복되는 거짓말 또한 가난에 결부되는 폭력을 마치 빈자의 책임인 것처럼 비춘다. 이 인물들은 구직 혹은 계급 상승을 위해 학력과 배경을 꾸며낸 채 부자의 사회로 진입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극 중 빈자들의 거짓말이 중심 소재로 등장하는 이유를 “빈자의 거짓말은 그것에 속아 넘어가는 부자들와 대결 구도를 형성하며 재미를 추동하는 서사적 장치로 기능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극이 진행될수록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이들은 끝내 자신이 저지른 거짓말의 늪에 빠져 파국을 맞는다. 이는 은연중에 관객이 이들의 비극을 자업자득으로 인식하게 한다. 한송희 연구자는 “스스로가 원해서 한 일이라는 논리는 주로 권력자의 발화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연출이 결과적으로 관객의 시선을 누구와 일치시키는지 반문해야 한다는 의미다.

 

가난은 늘 낮고 어둡고 더러운 곳에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가장 높고 밝은 곳으로.” 〈작은 아씨들〉에 수차례 등장하며 강조된 문구다. 가난을 다루는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또 다른 공통점은 빈부의 대비가 각종 이분법을 통해 명징하게 드러나며, 빈자가 겪는 상대적 박탈감과 불행이 극도로 부각된다는 점이다. 〈안나〉에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부잣집 딸 ‘현주’와 엎드려 청소하는 유미를 대비시킨 구도가 빈번히 등장한다. 유미의 비참함은 현주를 피하기 위해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23층을 오르는 맨발이 클로즈업되며 극에 달한다. 〈기생충〉도 마찬가지다. 한송희 연구자는 “〈기생충〉은 대저택, 반지하, 지하실의 공간 분리를 통해 ‘문명과 야만’, ‘위생과 불결’이라는 이분법을 형성한다”라고 분석한다. 계급 차이를 드러내는 연출이 빈자를 자연스레 미개하고 불결한 위치에 둔다는 것이다.

 

가난 빼기 사람

가난을 다루는 작품은 가난한 삶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내세운다. 그러나 가난이 ‘머릿결’과 ‘구두’를 통해 티가 난다는 〈안나〉와 ‘겨울옷’을 통해 티가 난다는 〈작은 아씨들〉은 관객의 자기 검열을 유도한다. 〈작은 아씨들〉 속 “가난하게 컸어? 하도 잘 참아서.”와 “돈이 없으면 죽는다”라는 대사로 가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정점에 달한다. 이는 그런 인식이 팽배한 사회를 비판하면서, 한편으로는 가난이 숨겨야 하는 치부라는 인식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수용될 수도 있다. 이로써 스크린은 가난을 중심에 배치하면서 현실의 가난을 주변부로 밀어낸다.

특히 〈기생충〉의 ‘반지하 냄새’와 ‘지하철 냄새’는 지하철을 이용하는 수많은 서민을 냄새 나는 존재로 뭉뚱그림으로써 강한 인상을 남겼다. 정덕현 평론가는 “냄새는 우리의 인식 속에 있는 것으로, ‘반지하 냄새’는 이를 이용해 가난한 계층을 후각적으로 표징한 것”이라고 해설한다. 그의 말대로 ‘반지하 냄새’는 ‘박 사장’ 가족이 기택 가족에 대해 느끼는 혐오감을 드러내면서도 두 가족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계급을 파고드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쯤에서 ‘반지하 냄새’의 정체가 무엇인지, ‘반지하 냄새’를 풍기는 것이 인간인지 공간인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반지하 냄새’는 공간적 특성에 기인하는 자연스러운 냄새이며, 모든 반지하 거주자에게서 동일한 악취가 난다고 보기도 어렵다. 한송희 연구자는 “‘가난=냄새’라는 도식을 형성하는 결과가 초래된다”라고 꼬집는다. 빈자는 개별적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은 빼앗기고 ‘빈곤’이라는 상상된 특성만 부여받게 된다.

 

가난을 다룬 작품들은 자본주의의 고질적 모순과 구조적 불평등을 폭로하고 가난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의의가 분명하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 고발이라는 명분을 벗고, 가난을 다뤄 온 납작한 방식에 대한 예민한 성찰이 이뤄질 때다. 거대한 관념으로서의 가난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개별적 삶에 밀착해야 한다. 가난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끊임없이 물을 때 비로소 빈곤이 관객의 시선에서 소외되지 않고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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