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딱딱한 단어다. 위인, 걸인, 악인, 선인, 그 어떤 이의 사정도 봐주지 않고 찾아오니까 말이다. 하지만 삶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을 들여다볼 기회를 주는 단어 역시 죽음이다.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은 죽음을 직면한 자의 용기를 보여준다.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 앞에서 삶의 의미를 포착하자는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 개념도 비슷하게 이해될 수 있다. 카뮈의 말을 변용해서 이 글의 주제를 말하고자 한다. 정말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그것은 죽음이다.

자살은 죽음을 향한 적극적인 구애다. 봉준호의 〈괴물〉 (2006) 오프닝. 자살하는 자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괴물에 짓밟혀 죽은 사람들과 다르게, 그는 괴물이 자신을 짓밟을 순간도 주지 않는다. “끝까지 둔해 빠진 새끼들”이라는 그의 유언은 자살하는 자의 기민함을 보여준다. 살아 있는 자들은 자살자를 향해, 삶의 참맛을 모른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참맛 이후의 쓴맛까지 모두 맛본 진정한 미식가다. 삶이 쓰라린 고통으로 가득하다면, 죽음으로써 고통에서 탈피할 수 있다. 죽음의 절대적 부정은 삶에서 고통을 느끼지 못한 자의 어설픈 변호다. 정말 고통스러운 자는 죽음을 지지한다. 오이디푸스도 말하지 않았는가. “죽음은 구원”이라고 말이다. 죽음과 자살을 다르게 대하는 이중 잣대의 정당성, 그것은 죽음을 직면할 용기가 없는 자들의 두려움에서 기인한 위증이 아닐까.

미야자키 하야오는 〈모노노케 히메〉 (1997)에서 죽음의 본질을 보여준다. 사슴 신은 생성의 모습을 한 죽음 신이다. 무한한 긍정도, 부정도, 삶도 없다는 계시. 그의 목이 잘린 순간, 그는 이성이 알아챌 수 없는 ‘죽음–직관’을 온 땅에 비춘다. ‘죽음–직관’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성된 시간성과 고향과 타향, 안과 밖으로 구성된 공간성을 배제하게 한다. 그것은 단 한 가지 질문만을 남긴다: 지금 여기에 살고 싶니? 죽음을 감수한 자들–‘아시타카’, ‘산’, ‘에보시’–의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질주는 죽음을 향한 결단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방증이다. ‘죽음–직관’이 남긴 질문에 대한 당신의 답은 무엇인가?

죽음을 향한 일회성의 레이스에 등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출발선과 결승선, 그리고 일방통행 도로만이 존재한다. 선택지는 질주 혹은 정지. “‘자살’의 반대말은 ‘살자’”라고 말하는 자들은, 결승선 직전의 사람들에게 ‘산삼’을 강제 투입하는 것이다. 중립 기어 차량을 밀어버리는 훌리건을 제압하자. ‘죽음–토론’에서 입론과 반론의 주체는 오로지 ‘나’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생각을 인지하는 자는 나뿐이라는 유아론적 한계 상황. 이것은 죽음에도 적용된다. “나는 ‘죽음–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정식의 탄생!

죽음은 비극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원히 힘을 쓸 필요 없는 상태. 그것은 휴식이다. 햄릿이 말하지 않았는가. “죽는 건, 자는 것”이라고. 영면(永眠)과 ‘고이 잠드소서’, ‘R.I.P’와 잠든 공주를 깨우는 왕자의 키스. 살인자 가인(Cain)을 죽이는 자에게 벌을 주겠다는 여호와의 발언. 그 모든 것은 한 가지 메시지를 향한다: 죽음은 잠. 단, 그 잠에서 깨어나긴 어렵다.

죽음에 대한 논의는 우리에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기억해보는 건 어떤가? 우리는 매일 잠 들면서 내일 일어날 수 있을지 걱정하지 않는다. 머리맡에 있는 죽음을 간과한 채 말이다. 사고 실험이 필요하다. 죽기 1초 전, 판사가 묻는다. “피고인, 왜 살아야 합니까?” 피고인만이 답할 수 있다. 위증은 죄이니 솔직하게 답하자. 다만, 판사는 귀마개를 끼고 있을 것이다. 죽음은 딱딱한 단어니까.

 

이효준

사회학과·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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