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 만난 사람들 | 김영대 대중음악 평론가

2022 FIFA 카타르 월드컵의 시작을 연 BTS 정국의 열창, 연일 들려오는 K-POP(케이팝) 아티스트의 수상 소식들. 케이팝이 전 세계적인 대중문화의 일부가 됐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나 아티스트의 음반 판매량과 해외에서의 인정, 국위선양이 정말로 케이팝의 전부일까. 케이팝이 더 나은 예술과 산업이 되기를 바라며 문화와 음악에 대한 애정으로 글을 써 내려가는 사람이 있다. 냉철한 평론에서는 쉽게 묻어 나오지 않던 따스함으로 기자를 맞이한 김영대 대중음악 평론가. 지난 7일(월) KBS 신관에서 김영대 대중음악 평론가를 만나, 그가 걸어온 삶과 케이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돌고 돌아 결국은, 음악

Q. PC 통신* 시절부터 지금까지 ‘투째지’(toojazzy)라는 아이디를 꾸준히 사용하고 계세요. 아이디를 ‘투째지’로 지으신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재즈를 너무 좋아해서, 난 너무도 ‘째지’(jazzy)한 음악 취향을 갖고 있다는 게 절반의 사실이에요. 나머지 사실은, 재즈 관련된 아이디를 지으려고 했는데 이미 다 있는 아이디였다는 거예요. ‘째지’도 있었는데, ‘나는 한 수 위의 째지함을 보여주겠다’고 해서 ‘투째지’가 된 거죠. 사실 더 직접적인 건 제가 조지 마이클을 굉장히 좋아하고, 당시 나우누리*에 가입할 때 책상에 조지 마이클의 《Too Funky》 CD 싱글이 놓여 있었어요. 그 곡의 재즈 리믹스 버전인 〈Too Jazzy〉에서 따온 것도 있어요. 

‐ 평론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제가 중학생일 때는 레코드를 사면 앨범 속지에 음반에 관해 써놓은 글이 있었기에 음악 평론을 쉽게 접할 수 있었어요. 그 글을 보고, 똑같이 음악을 듣는데 누군가는 음악을 소재로 글을 쓰고 심지어는 돈까지 번다는 게 이상적으로 느껴졌어요.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도 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셨죠. 교무실에 갔다가 선생님 책상 위에 있던 재즈 가수 해리 코닉 주니어의 음반을 보고 아는 척을 했어요. 선생님께서 “너 재즈 좋아하니” 물어보시며 해리 코닉 주니어가 재즈의 전부는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당연히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니까 마일스 데이비스 언급도 했더니, 선생님이 가지고 계시던 재즈 테이프를 빌려주시고 스크랩해 놓으셨던 기사도 보여주셨어요. 그 외에도 수업 시간에 콘서트 비디오를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감상문을 써내라고 하시기도 했어요. 학생들 앞에서 제 글을 읽어주시기도 했고요. 그때 써낸 게 아마 제 최초의 음악 평론이었을 거예요. 

Q.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셨는데, 음악과는 무관하지 않나요?

경영을 하려고 간 건 아니었어요. 점수에 맞춰서 대학에 갔는데, ‘회계원리’ 첫 수업을 듣자마자 ‘내 갈 길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고민하다가 졸업을 빨리 해 버리자는 결심을 했어요. 그래서 경영학 졸업 요건을 채우고 심리학 복수전공을 했죠. 그런데 제가 관심이 있던 부분은 사회심리학이었는데, 그때는 인지심리학으로 동향이 바뀌고 있었어요. 심리학과도 겨우 졸업했죠. 

‐ 대학에 가서도 음악 관련 활동을 계속 하셨나요?

대학에 가면 무슨 과에 가든 음악에 관한 글을 쓰고 음악을 해 보자는 목표가 있었어요. 당시는 전람회, TOY, 015B, 윤상, 조규찬 같은 싱어송라이터의 서정적인 음악이 대세였고, 저도 그런 음악을 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PC 통신으로 알게 된 서울대 출신의 피아노 치는 친구와 작곡 팀을 꾸려서 곡도 쓰고 데모 테이프도 만들었죠. 물론 망했지만요. (웃음)

‘뮤지션이 되고 싶다’ 그리고 ‘음악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두 가지 욕구가 공존하기는 했지만, 평론가는 거의 우연으로 됐어요. 내 커리어에 평론가가 있으면 멋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고, 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한 건 아니었죠. 그런데 PC 통신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이 그 글을 좋아하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글이지만, 제 나이에 비해서는 성숙한 느낌이었거나 제가 음악을 많이 들어서 그랬는지, 글로만 봐서는 20살이 썼다고 생각이 안 됐던 거죠. 음대 교수 아니냐는 말도 있었고요. 천리안*과 나우누리의 나름 유명한 필자가 됐어요.

1997년 겁 없던 대학교 1학년 때, 최초로 사이버 음악 시상식을 만들었어요. 이름이 ‘MMA’(Muse Music Award), 지금의 멜론뮤직어워드(Melon Music Awards)랑 약어가 똑같아요. 나름 뮤지션 사이에서도 화제가 됐어요. 수상한 뮤지션이 저에게 연락도 하고, 「문화일보」와 인터뷰도 하고, 유희열 씨가 DJ였던 〈FM 음악도시〉에 출연도 했죠. 

1998년에 박준흠 평론가께서 「서브」라는 잡지를 만들면서 제게 연락해 주셨어요. 미국의 「롤링 스톤」처럼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을 뽑아보자고 하셨죠. 100대 명반을 뽑는 작업이 지금까지 1998년, 2007년, 2018년 10년 단위로 세 번 이뤄졌고, 제가 유일하게 세 번 모두 참여했어요. 평론가라는 직함을 달고 나간 최초의 일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대학원에 가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대학원을 알아보면서 우연히 서점에서 『세계문화기행』을 접했고, 너무 재미있어서 누가 썼는지 보니까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님이었어요. 그날로 서점에 있는 문화인류학 서가에 꽂힌 책을 다 사 와서 탐독하고, 결국 대학원에 가게 됐어요. 

‐ 그렇지만 한양대 문화인류학과도 중간에 그만두고 워싱턴대 음악인류학 전공으로 유학을 가셨어요.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나요?

제가 ‘이게 약간 조금 또 아닌 병’에 걸려서 문화인류학 대학원도 딱 맞는 건 아니었어요. 결국은 제가 음악을 좋아하는데, 음악을 공부하면 길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계속 음악과 비슷한 다른 분야를 맴돈 거예요.

지도교수님 연구 분야를 따라서 탈북자 관련해 논문도 준비를 해 봤지만, 하기 싫으니까 진정성이 없고 2년이 지났는데도 석사 학위 논문의 조짐이 안 보였어요. 그 와중에 잡지나 웹진*에 음악 평론 일은 계속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내 취미일 뿐이고 한 번도 일이나 직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죠.

방황하다가 군대를 다녀왔고 대학원에 복귀를 했는데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때 제가 제대하고 의욕에 차서 사람을 모아 『90년대를 빛낸 명반 50』을 두 달 만에 써내요. ‘음악 쪽으로 나가야 하나’를 진지하게 생각하던 중 돈은 벌어야 하니까 채용 공고 웹 사이트를 들락날락했죠. 마침 연예 기획사에 채용 공고가 떠서 지원을 했더니 합격했어요. 

지도교수님께 연예 기획사에 들어간다고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선생님이 “난 너에게 참 실망했다”라며 제가 현실적인 직업을 택했다는 데 아쉬움을 표하셨어요. 저도 약간은 울컥했고 그때 유학을 결심했어요. 선생님과의 술자리 때문에 그랬을지는 몰라도, 제 마음 한구석에 공부에 대한 욕구는 늘 있었어요. 음악 평론가인데, 미국을 가본 적도 없으면서 이론적 기반도 없이 말로만 ‘힙합이 어떻고’, ‘블루스가 어떻고’ 하는 게 스스로 창피했거든요. 요즘으로 따지면 위키피디아 보고 배운 지식으로 쓰는 느낌이잖아요. 그 와중에 선생님께서 너 같은 애를 위한 인류학, 즉 ‘음악인류학’(Ethnomusicology)이 있다고 소개해 주신 거죠. 

‐ 음악인류학이라는 학문이 생소하게 느껴져요.

번역도 어려워요. 말 그대로 번역하면 민족음악학인데, 그건 학문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이야기고 지금은 동향이 바뀌었어요. 대중음악이나 음악 산업도 다루죠. 학문의 핵심은 음악학이되, 인류학적인 질적 연구를 수반해요. 악보도 연구하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뮤지션, 그리고 문화로서의 음악 산업을 복합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추구하죠.

*PC 통신: 1977년부터 현재의 월드 와이드 웹(WWW) 이전까지 사용하던 통신 방식. 개인용 컴퓨터를 정보망이나 다른 컴퓨터에 연결해 통신함으로써 여러 가지 정보를 주고받는 것.

*나우누리: 1994년에 나우콤에서 제공하기 시작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 

*천리안: 미디어로그가 제공하던 PC 통신 온라인 서비스.

*웹진: 유형(有形)으로 인쇄하지 않고 인터넷상으로만 인터넷상으로만 만들어 보급하는 잡지.

 

예술과 산업을 동시에 아우르는 평론

Q. 2007년부터 시애틀에 거주하면서 미국 팝뮤직(팝)을 연구하셨잖아요. 그때와 비교해서 최근 미국 내 케이팝 입지는 어떻게 변화했나요?

BTS,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싸이의 〈강남스타일〉 이전에는 미국에서 케이팝을 진지하게 고려하지는 않았어요. 워낙 절대적인 자신들의 주류 음악이 있으니까요. 무시하는 게 아니라, 아시아권의 대중음악이 세계적인 음악이 된 사례는 없잖아요. J-POP을 즐기는 사람이 있듯 케이팝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는 정도였죠. 아주 마니악한 분위기였고, 제가 케이팝 관련 논문을 쓴다고 했을 때도 ‘그런 걸로 논문을 쓰나?’라는 반응도 있었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두 번에 걸쳐서 바뀌어요. 〈강남스타일〉이 흥행했을 때 미국 사회 전반에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어요. BTS 이후로는 대세가 됐죠.

 

Q. 「조선일보」, 「한겨레」 등 일간지에 연재를 하셨고, 최근에는 〈김어준의 뉴스공장〉에도 출연하신 바 있어요.

미국에 있을 때도 신문 기고는 계속 했었어요. 사람들이 〈강남스타일〉 이후로 외국의 시선을 궁금해 하면서 본격적으로 많이 쓰기 시작했죠. 현지 통신원 느낌으로 기고를 하며 제 입지가 생겼고, 「뉴요커」나 MTV에도 기고했고요. 지금은 방송 쪽으로 일이 많이 생겨서 방송인 겸 평론가처럼 됐는데 다 연장선상에 있는 거죠.

‐ 각 매체별로 원하는 음악 이야기가 조금씩은 다를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님께서 변함없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을까요?

인기 가요로서 케이팝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글로벌한 현상으로서 케이팝을 본다는 게 제가 차별화되는 지점 같아요. 또한 저는 음악을 예술적인 부분과 산업적인 부분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게 싫어요. 예술로만 보면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산업으로만 보면 경제적 가치만 따지게 돼요. 그래서 제 글에는 항상 예술적인 동기와 산업적인 동기를 함께 녹이려 해요.

‐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고 출연하시지만, 평론가님께 좌파라는 프레임이 씌워지고는 하잖아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치 이야기는 하지도 않는 음악 평론가에게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이유로 좌파니 정치적이니 하는 현실 자체가 슬퍼요. 어쩌면 정치적이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이 제일 정치적인 게 아닐까요.

‐ 최근에는 TBN에서 〈김영대 프로젝트〉 라디오 DJ가 되셨어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 프로그램만의 특색은 무엇인가요?

제 코너는 넓은 의미의 케이팝 방송이에요. 케이팝이라고 하면 아이돌만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음악까지 다 케이팝이라고 봐요. X세대부터 MZ세대까지 함께 들을 수 있는 범용 케이팝 방송을 하고 싶어요. 평론가가 DJ니까 음악에 얽힌 이야기를 다양하게 할 수 있겠죠. 아직 4회밖에 진행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지켜봐 주세요.

 

“아이돌은 아티스트다”

Q. 많은 사람들이 아이돌을 한 명의 아티스트로 인정하기를 꺼리잖아요. 『지금 여기의 아이돌‐아티스트』에서는 그 이유로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가공품이라는 생각’을 뽑으셨는데,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부탁드리고 싶어요.

‘아이돌은 아티스트다’라는 것은 당연한 말을 일부러 던지는 거예요. 사람들은 아티스트라는 말에 선입견이 있는 것 같아요. 아티스트는 예술을 하는 사람이고, 그 형태가 댄서든 아이돌이든 작곡가든 싱어송라이터든 다 아티스트죠. 신중현이나 조용필과 같은 거장들만 아티스트는 아니에요.

그리고 한국은 아이돌 음악에 지나치게 부정적이에요. ‘아이돌은 생각이 없다’라고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인간의 일이니까 나름의 방식과 생각이 수반되는 거죠. 아이돌이라고 하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인공적이고 영혼 없는 이미지가 있는데, 적어도 제가 만나본 아이돌은 거의 그렇지 않아요. 

잘 생각해 보면 그 기저에는 ‘록 본위주의’(Rockism)가 있더라고요. 댄스 음악은 음악이 아니고 록 음악만 음악이라는 편견이요. 하지만 음악을 만들어본 사람이라면 댄스 음악을 잘 만들기가 정말 어렵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무대에서 그런 종류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게 수준급의 기타 연주보다 더 어려워요. 저는 그런 편견에 문화적·성적·인종적 함의가 있다고 봐요. 예를 들면, 댄스 음악은 남자들이 화장하고 나오니까 남자답지 못한 것이라고 보는 시선처럼요.

‐ 걸그룹 노래는 보편적으로 많이 듣지만, 보이그룹 노래는 비교적으로 마니아만 듣는 것도 해당될까요?

그 현상에는 만든 사람 책임도 있어요. 보이그룹 노래는 그 그룹의 팬덤을 만족시키려다 보니 보편적으로 만들기보다는 너무 어렵게 만들어요. 

‐ 책에서 ‘아이돌 음악=저열한 댄스 음악’으로만 인식되는 데는 만들어 온 사람들의 게으름과 안이함이 깔려 있는 게 사실이라고 하셨어요. 구체적으로 설명을 부탁드려요.

아이돌이 자신을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데, 회사에서 천편일률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티스트가 표현하고 싶은 예술적 욕구가 있는데, ‘이번에는 이런 스타일과 콘셉트가 흥행했으니 다음에도 그렇게 하면 되겠지’ 같은 생각이요. 아이돌보다는 기획하는 사람의 책임이 아닐까요.

 

Q. 최근 BTS의 성과를 바라보는 언론의 시선은 국위선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소위 ‘국뽕’도 나름의 의미는 있죠. 한국은 한 번도 문화로 세계를 이끌어본 적 없는 나라고, 특히 대중문화라는 현대 산업에서 한국은 늘 ‘팔로워’(follower)였지 리더가 된 적은 없었기에 스스로 열등감이 있었어요. 최근에는 〈오징어 게임〉, 〈기생충〉, BTS 같은 사례가 그 열등감을 극복하게 해 줬고요. 어쩌면 편집장님 같은 Z세대는 그런 열등감이 없을 수 있어요. 하지만 윗세대는 자신감이 필요하고, 그래서 케이팝의 예술적 가치보다 BTS가 1위를 한 것, 음반을 많이 판 것, 외국인이 BTS를 좋아한다는 것을 중요시하죠. 그런데 뉴스에 그런 것만 담는 게 아쉽죠. 정작 왜 사람들이 케이팝에 열광하는지, 어떻게 잘 만들 수 있는지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요.

 

Q. 곧 연말 시상식 시즌이에요. 시상식 투표나 음반 판매량에는 팬덤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하잖아요. 아이돌도 훌륭하지만 그 밖의 대단한 뮤지션이 많은데도 그 성과를 충분히 보상받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남아요.

케이팝이 전 세계적으로 ‘핫’하고 유망한 산업이라고 보니까 모든 투자를 그에 집중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전반적으로 그런 경향이 있죠. 당연히 다른 장르의 뮤지션이나 재능 있는 인디* 가수가 소외받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이 현상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일례로, 옛날에는 힙합이 언더그라운드* 장르였지만 지금은 〈쇼미더머니〉나 〈고등래퍼〉 같은 힙합 프로그램의 인기가 좋은 것처럼요. 이제는 케이팝, 힙합, 트로트 정도 빼면 주목받기 어렵고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렇기에 평론가가 지속적으로 ‘이런 음악도 있다’는 식으로 다양성을 보여주며 주위를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해야죠.

 

Q. 케이팝 작업물 특성상 시각적인 요소가 동반되다 보니 다른 나라의 문화를 무분별하게 차용하는 경우도 꽤 있는 것 같은데, 케이팝의 문화 전유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주의 깊게 살펴야죠. 물론 문화 전유의 기준이 애매해요. 그 안에는 권력 관계나 정치성이 있어요. 한국 사람이 흑인의 문화를 인용하는 것은 문화 전유인가? 그러면 서양인이 기모노나 한복을 입는 것은? 백인이 흑인 문화를 도둑질하는 것은 문화 전유가 맞지만, 아시아인이 흑인 문화를 따라하는 것을 문화 전유라고만 볼 수 있을까요? 그래서 문화 ‘전유’(appropriation)도 있지만 문화 ‘향유’(appreciation)도 있거든요. 좋아서 따라한다는 뜻이죠.

그래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는 건 이런 의미예요. 지금 산업이 어떤 형태든 케이팝을 외국에 팔겠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외국에 영업하려는 사람들이 소비자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되죠. 내가 음악을 만든 의도가 좋았든 좋지 않았든, 수용자 측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다면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해요. 그런데 케이팝 산업은 이런 부분에 오랫동안 무지했고, 이를 무시해 왔죠. 아직도 드레드록스*가 무슨 문제냐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예전에는 얼굴을 까맣게 분장해 흑인을 따라하는 블랙 페이스도 자주 했었고요.

 

평론가, 그리고 사람 ‘김영대’

Q. “벽돌 올려놓기는 누군가 하라 하고 저는 그 벽돌을 만들고 싶어요”라고 말씀하신 바 있어요.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평론을 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을 결심했을 때 학교의 울타리는 떠나기로 마음먹었어요. 공부도 좋고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트렌드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교수보다는 프리랜서 작가나 평론가 혹은 방송인이 되는 게 저한테 맞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름대로 연구를 할 마음은 있지만, 저는 지금의 위치가 더 좋아요.

 

Q. 평론을 하려면 누구보다 그 작업물에 가까이 가야 하지만, 동시에 너무 마니악한 비평으로 흐르는 걸 주의해야 할 것 같아요.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려는 평론가님만의 노력이 있을까요?

노력하는 건 아닌데 제 성격상 누군가의 팬이 잘 안 돼요. 팬으로서의 저는 1990년대쯤에 이미 끝난 게 아닐까요. 물론 음악을 들을 때나 뮤직 비디오를 볼 때는 여느 팬들만큼 몰입해서 봐요. 그런데 그 시간이 끝나면 평론가의 사고방식으로 돌아와요. 평론가로서는 축복이지만, 한편으로는 순수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일종의 저주 같기도 해요.

‐ 사람들 반응은 얼마나 신경 쓰시나요?

제가 아이돌에 관한 글을 많이 쓰니까 팬이 듣기 좋은 소리를 한다고 착각하기 쉬운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제가 자부하는 부분이 있다면, 칭찬이나 비판과는 무관하게 맞는 이야기를 할 때만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하는 거예요. 사실 아이돌이나 아이돌 음악의 단점은 팬이 가장 잘 알아요. 말을 안 할 뿐이죠. 그렇지만 저는 아쉬운 말도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거든요. “이건 그냥 쓰레기야”라고 말하는 건 평론가가 아니죠. 단순히 팬들이 좋아해주냐 아니냐의 문제는 아니에요.

대부분 아이돌 음악 평론에 실패하는 이유는 평론과 무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에요. 아이돌이 구현한 희귀한 콘셉트를 보고 잘 됐는지를 평가해야 하는데, 그 콘셉트 자체가 난해하다고 하면 아예 출발 지점이 다른 거고 아이돌 음악 평론의 규칙을 모르는 거예요.

 

Q. 평론가님에게 의미가 깊은 곡이나 앨범이 있나요?

NCT U의 〈일곱 번째 감각〉이 평론을 하면서 제게 자부심을 준 곡이에요. 예를 들어 〈강남스타일〉만을 가지고 해외 언론을 상대하고 이를 연구 주제로 삼았다면 제가 쉽게 몰입하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일곱 번째 감각〉을 통해 케이팝이 이렇게 수준 높고 정교하다는 것을 내세울 수 있게 된 거죠. 앨범 중에서는 BTS의 《LOVE YOURSELF 轉 ‘Tear’》요. 음악적으로도 훌륭하지만, 제가 BTS라는 그룹을 새롭게 해석하게 됐던 시점이 정점을 찍었던 앨범이에요.

 

Q. 평론가로서 단기적인 목표와, 사람 ‘김영대’가 이루고 싶은 인생의 목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단기적으로는 『BTS: The Review』의 후속편을 써야 해요. 계약이 됐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여기의 아이돌–아티스트』처럼 김완선, 윤복희, 아이유 등 많은 케이팝 여성 아티스트에 대해 써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장기적으로는 굉장히 좋은 인터뷰어가 되고 싶어요. 일과 연구를 하다 보니 자료 중에 인터뷰가 정말 중요하더라고요. 어쩔 때는 저의 글보다 제가 한 이런 인터뷰에서 더 좋은 이야기를 한 경우가 많고요. 아티스트가 어디에서도 하지 못했던 말을 저를 만나서 터놓을 수 있는, 편하고 통찰력 있는 대화 상대가 되고 싶어요. 그런 인터뷰어가 되려면 인터뷰이에게 진짜 관심이 있어야겠죠. 그게 인류학과에서 배운 것이기도 해요. 질적 조사의 가장 첫째가는 덕목이잖아요. 문화와 그 사람에 대한 애정. 

 

*인디: ‘인디펜던스’(independence)의 준말로, 영화·음반 제작에서 소규모의 예산으로 활동하는 회사. 또는 거기서 만들어 낸 영화나 음반.

*언더그라운드: 상업성을 무시한 예술의 풍조.

*드레드록스(Dreadlocks): 머리카락을 여러 가닥으로 땋아 늘어뜨린 머리 모양. 한국에서는 레게 가수가 주로 했다고 해서 레게 머리로 알려져 있다.

 

레이아웃: 구효주 편집장 altlghzk@snu.ac.kr

사진: 구민지 기자 grrr02@snu.ac.kr

삽화: 박재아 기자 0204jaea@snu.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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