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시간을 돈 대신 사용하기도 한다. 시간을 들여 노동하고 돈을 받는 것 외에도 돈 대신 시간을 들여 지출 부담을 덜기도 한다. 시간에 관한 경제학 연구로 은퇴 후 가계의 식료품 지출이 줄어드는 미스터리한 현상의 원인을 분석한 연구가 있다. 생애 소비 가설에 의하면 젊을 때 저축하고, 은퇴 후 연금과 저축한 돈으로 소비하기 때문에 은퇴 전과 후에 소비 지출이 어느 정도 비슷하게 유지돼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 미스터리는 은퇴자의 시간 사용을 분석하며 풀렸다. 은퇴 후 가계는 실제 소비 수준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식료품 지출 금액만 줄인다. 남아도는 시간으로 신문, 잡지 등을 탐색해 할인 쿠폰 등을 모으고, 멀리 떨어진 가게까지 가서 저렴하게 식료품을 조달한다. 실제 식료품 소비 수준은 비슷하게 유지되면서 지출 금액만 낮아진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돈 대신 시간을 사용해 식료품을 소비한 것이다. 

감탄하면서 봤던 연구이지만, 사실 나도 시간을 들여 소비 지출액 증가를 제한하고 있다.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던 친구를 따라 미국 블랙프라이데이 쇼핑에 입문한 나는 시간을 들여 익숙하지 않은 미국 결제, 배송 대행 시스템에 적응하고, 무관세 범위인 200달러 내로 알차게 담아 괜찮은 옷들을 산다. P 브랜드의 옷은 평소에도 미국 가격이 한국 가격보다 저렴한데 30퍼센트 할인을 받으면 평소 한국 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구할 수 있다. 이런 소비는 1년 동안의 기다림과 구매 과정에서 노력을 대가로 낸다. 대학생 시절부터 저렴한 스파 브랜드를 중심으로 입었지만, 이제 시간을 대가로 금액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면서 더 좋은 브랜드를 입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올해는 환율에 문제가 생겼다. 평소 1,100원을 중심으로 결정되던 환율이 순식간에 1,300원을 넘었다. 시간을 들여 싸게 물건을 살 유인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런 고민 중 연말 할인이 날아든다. 코로나19로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 돈을 풀었던 작년에는 재고가 동이 났다고 하지만, 올해는 전 세계적인 긴축 기조에 민간 소비 심리가 작년과 같지 않아 블랙프라이데이에 기업의 재고가 충분히 소진되지 않으면 크리스마스 시즌에 더 큰 할인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마지막 할인은 옷을 저렴하게 사들일 기회이기도 하지만, 내가 시간을 들이는 다른 일들의 가치가 얼마인지 평가할 기회이기도 하다. 원래대로라면 한 달 더 기다리면서 할인을 노려보는 것이 좋은 선택이었을 테지만, 12월은 한 해 진행한 연구를 마무리해야 하고, 연말 모임도 많아 바쁜 시기로 시간의 가치가 어느 때보다도 크다. 결국 나를 위한 쇼핑에는 크게 시간을 들이지 않기로 했다. 12월에 내가 집중해야 할 일들의 가치는 저렴한 쇼핑보다 높기 때문이다. 한 해 연구를 잘 마무리하고, 친구, 가족들과 충분히 좋은 시간을 보내며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 연말에 시간을 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삽화: 신윤서 기자 oo00ol@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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