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 반도체 산업이 나아갈 방향을 짚다

미·중 반도체 갈등이 격화하며 반도체 업계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10월 7일, 미국 상무부는 첨단 반도체 기술의 중국 유입을 사실상 완전히 금지하는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를 발표했다.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환경 변화는 반도체 산업 의존도가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인 한국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미·중 반도체 경쟁 속에서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반도체 산업의 생태계

첨단 기술은 군사 분야의 혁신과 미래 산업 분야 선점에 필요한 국가 경쟁력의 핵심 자산으로, 그 중요성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특히 반도체는 군사적 이용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김혁중 연구위원은 “핵심 군사 기술로 자리 잡고 있는 인공지능의 구현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반도체”라고 설명했다. 또한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소재 부품 장비를 공급하는 화학·기계 산업과 반도체 부품이 들어가는 전자 제품, 자동차, 통신 등의 산업이 모두 거대하기 때문이다.

반도체의 분류
반도체의 분류

한국은 데이터 저장을 담당하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반면, 연산·논리 기능을 담당하는 시스템 반도체 관련 성적은 부진하다. 삼성전자 메모리 사업부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의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56.9%에 달하지만 글로벌 시스템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3%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쟁력 불균형은 시스템 반도체 분야 내에서도 나타난다. 시스템 반도체 기업은 다시 설계를 담당하는 ‘팹리스’(fabless) 기업과 생산을 담당하는 ‘파운드리’(foundry) 기업으로 나뉘는데, 파운드리 분야에서는 삼성전자가 세계 2위를 달리는 데 반해 국내 팹리스 기업 중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곳은 전무하다.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와 파운드리 분야에 특화됐듯, 반도체 산업은 글로벌 분업이 세부적으로 이뤄져 있다. 미국이 압도적인 원천 기술을 바탕으로 팹리스 업계를 선도한다면, 대만 TSMC와 한국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분야를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분업 구조에 안주해 팹리스 기업 성장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글로벌 분업이 오히려 특정 국가의 독과점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팹리스가 파운드리보다 주목받고 있는 현 상황에 국내 반도체 산업이 파운드리에만 집중한다면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다. SK증권 리서치센터 김영우 센터장은 “생산 시설에 대한 대규모 설비 투자를 요하는 팹리스 분야는 미국이 독점하고, 그렇지 않은 반도체 생산은 동아시아가 전담하는 분업 구조”라고 설명했다. 이런 글로벌 분업 구조로 인해 반도체 산업은 정치적·경제적 상황과 국제 정세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충돌하는 미·중 사이에 낀 한국

한편 한국 반도체 업계는 미·중 갈등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국의 반도체 기업이 생산에 필요한 원천 기술은 미국의 것을 사용하고, 중국으로의 수출 비중이 높아 대부분의 매출을 중국에서 창출하기 때문이다. 최근 미·중 갈등의 심화로 인해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 기업들을 중심으로 피해가 점차 본격화하고 있다. 오픈엣지테크놀로지 최주환 부사장은 “미국 기술이 포함된 반도체의 중국 수출이 막히면서 애써 만들어 놓은 시스템 반도체를 중국에 판매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반도체 시장이 미·중 갈등의 무대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기술 패권을 두고 경쟁하기 시작한 양국에게 첨단 기술의 핵심인 반도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데 있다. 이에 바이든 행정부는 자국 내 반도체 생산 시설 유치를 꾀하는 한편, 광범위한 대중 수출 제재를 시행하고 있다. 특히 지난 10월 7일 미국 상무부는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 금지를 골자로 하는 반도체 수출 통제 강화 조치를 발표하며 첨단 반도체 기술이 중국으로 유입되는 것을 사실상 전면 봉쇄했다. 한국무역협회 강상지 연구원은 “유수의 반도체 장비 업체가 미국과 그 우방국에 소재해 있어 미국이 중국에게 높은 효과의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반도체 장비 업계는 미국·일본·네덜란드의 5개 기업이 시장 점유율의 80%를 차지하는 독과점 구조로, 중국 반도체 산업에는 반도체 제조 장비를 스스로 조달할 수 없다는 치명적 약점이 존재한다. 일례로 2019년 노광기*를 독점적으로 생산하는 네덜란드의 ASML이 미국의 압력으로 중국 기업에 노광기 수출을 중단하자 중국 파운드리 산업이 큰 타격을 입은 바 있다.

미국의 수출 규제는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김영우 센터장은 “한국은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에 투자를 가장 많이 한 국가”라고 설명했다. 현재 중국에서,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의 한 종류인 NAND의 40%를, SK하이닉스는 DRAM의 50%를 생산하고 있다. 국내 반도체 장비도 미국의 기술을 이용하므로 미국 상무부의 허가가 있어야 수출할 수 있다. 지난 10월 7일 발표된 조치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1년간 반도체 장비를 중국 공장으로 반입할 수 있는 유예 기간을 부여받았지만, 장기적 전망은 불투명하다. 김혁중 연구위원은 “추후 대중 수출 규제가 더욱 강화되면 한국 기업이 중국 밖으로 공장을 이전해야 할 수 있다”라고 우려를 드러냈다.

미국이 자국 내 반도체 제조 시설 투자를 확대할 목적으로 지난 8월 제정한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반도체법)도 한국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법에 따라 미국 내 반도체 제조 시설에 투자하는 기업은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제공받는다. 그러나 미국의 보조금 지원을 받은 기업에게는 10년 내 중국에 공장을 신설·증설하지 못한다는 ‘가드레일 조항’이 적용된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 주에 170억 달러를 들여 파운드리 공장을 짓는 등 반도체법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 중국 내 사업 확장이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배영자 교수(건국대 정치외교학부)는 “미국은 이처럼 반도체법을 통해 자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 시설을 확보하고 동시에 중국을 견제하려 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다만 반도체법이 국내 개별 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김혁중 연구위원은 “비단 세제 혜택이 아니더라도 전방 산업*이 많이 포진한 미국에 투자하는 것은 시장 접근성을 늘리는 차원에서 긍정적이다”라며 “기업이 투자를 하는 이유는 그만큼의 수익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영우 센터장은 “한국과 중국에 비해 미국은 인건비가 높아 기업의 운영비 부담이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산업계 전반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대부분이다. 배영자 교수는 “막대한 대미 투자로 인해 국내 투자 동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경우 한국이 지속적으로 최첨단 반도체 공정의 구심점으로 남을 수 있을지 염려된다”라고 전했다. 김영우 센터장은 “생산 시설의 미국 이전으로 한국의 잠재 성장률*이 떨어질 위험이 있다”라며 부정적인 전망을 드러냈다. 

 

한국,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미·중 갈등으로 인해 양국 모두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결국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원론적으로는 외교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김혁중 연구위원은 “모니터링과 정보 공유를 통해 각국 정부와 소통하며 우리 기업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며 “더 나아가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입장을 반영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배영자 교수는 “한국의 과제는 미·중 양국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국익 제고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배 교수는 그 답으로 “앞서 있는 메모리 반도체나 파운드리 분야에서 우위를 유지하는 것”을 지목했다. 김혁중 연구위원도 “일단 경쟁력을 갖고 있어야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라고 말했다. 기술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의 반도체 기업이 공존하는 생태계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최주환 부사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파운드리와 팹리스는 전체 반도체 생태계에 꼭 필요한 상호 보완적 존재”라며 “각 분야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산업 생태계를 구성하는 만큼 국내에서도 균형적인 발전이 요구된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시스템 반도체 기업, 그중에서도 특히 팹리스 기업에 대한 국내의 관심과 지원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주환 부사장은 “중소기업과 시스템 반도체가 국가 지원의 사각지대에 있었기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중 인력 부족이 가장 시급한 문제로 떠오른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배근 실장은 “인력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부족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교육부 정상은 과장은 “반도체 산업의 규모 확장세에 따라 산업 인력도 지금보다 약 12.7만 명의 인력이 더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관계부처 합동 조사에 따르면 인력 공급은 연간 약 5천여 명 규모에 그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전체 인력 중 반도체 설계 경험이 있는 고급 인력은 더욱 부족하다. 전 실장은 “기업과 대학 간 네트워크를 형성해 산학 협력의 기회를 확대하는 등 적극적 지원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미·중 반도체 기술 경쟁으로 반도체 산업의 구도가 다시금 크게 재편되고 있다. 현재의 변화는 위기이자 기회다. 반도체 첨단 기술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한국은 반도체 산업에서의 입지를 잃고 뒤처질 것이 자명하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치밀한 전략과 정책이 요구되는 시기다.

*노광기: 설계한 회로 패턴을 웨이퍼에 그리는 리소그라피(lithography) 공정에 사용되는 광학 장비.

*전방 산업: 어떤 재료나 소재를 이용하여 특정 제품을 생산하거나 판매하는 산업.

*잠재 성장률: 한 국가의 자원을 최대로 활용했을 때 달성 가능한 성장률로, 국가 경제의 최대 성장 능력을 뜻한다.

인포그래픽: 신윤서 기자

oo00ol@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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