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대화 | 신형철 평론가를 만나다

문학 비평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미미한 시대다. 그러나 신형철 평론가는 본질을 꿰뚫는 정확한 언어와 아름다운 문장으로 등단 이래 대중의 사랑을 놓쳐본 적 없다. 문학 현장의 한가운데서 쉼 없이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조선대 문예창작학과에서 새로운 문인을 육성해왔던 그가, 10년 만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부임하며 모교로 돌아왔다. 지난달 23일, 비평의 본질은 비판에 있다는 통념을 깨고,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사랑이 담긴 목소리로 문학을 이야기하는 신형철 평론가를 만났다.

 

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 살기 위해 쓰는 것

신형철 평론가는 ‘독후감 작가’가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책을 읽는 게 좋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더 좋았으며, 글을 쓸 때면 늘 칭찬을 받았다. “남들과는 다르게 읽어내는 것에 대한 열망과 쾌감”이 계속 쓰게 하는 동력이 됐고, 곧 전공이자 직업이, 마침내는 삶 자체가 됐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몰락의 에티카다. 온 세계가 성공을 말할 때 문학은 몰락을 선택한 자들을 내세워 삶을 바꿔야 한다고 세계는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문학이 이런 것이라서 그토록 아껴왔거니와, 시정의 의론들이 아무리 흉흉해도 나는 문학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몰락의 에티카』(2008)

삶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문학에서 그 답을 찾았다는 신형철 평론가의 첫 평론집 제목은 『몰락의 에티카』(2008)다. 이 책이 출간된 2008년은 가라타니 고진*의 저서 『근대문학의 종언』의 충격으로, 한국 문단 안에서도 문학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회의적인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을 때였다. 『몰락의 에티카』는 이에 맞서 문학은 살아 있는 유기체라고 외친다. 21세기 한국문학에 근대와는 다른, 새로운 ‘에티카’*의 지평이 펼쳐지고 있음을 밝히려는 시도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 (중략) …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 

- 『몰락의 에티카』(2008)

신형철 평론가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른바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스템을 옹호하는 ‘선의 윤리’가 아닌 미시 세계에서 ‘마이너리티의 욕망’과 역동하는 ‘진실의 윤리’를 ‘몰락의 에티카’라 이름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라는 질문을 치열하게 묻고, 이에 답함으로써 “참혹하지만 진실한 윤리”를 추구하는 것이 문학의 몫이다. 신형철 평론가가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몰락의 에티카』에서 비평하는 작품에 담긴 수십 작가의 수백 갈래 목소리와, 그 목소리를 통역하는 신 평론가의 유심하게 벼려진* 시선은 ‘몰락의 에티카’를 향해 간다.

문학에 대한 신형철 평론가의 사랑이 단순한 애정을 넘어 ‘필연’에 가까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에티카에 대해 질문하는 서사는 장르를 불문하고 어느 예술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신형철 평론가는 영화도, 음악도, 미술도 아닌 ‘문학’에 질문하기를 택했다. 그에게 그 배경을 묻자, “저한테는 언어가 중요하고 문학의 매체는 오직 언어”라며 “그렇기 때문에 꼭 문학이어야만 한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신 평론가는 추상적인 것에 대한 서술, 궁극적으로는 ‘인간 내면에 대한 재현의 능력’을 언어와 문학의 힘으로 꼽는다. 

자신과 타인의 내면을 더 깊이 파고들고 싶다는 바람이 일관되게 중요한 화두였다는 신형철 평론가는 “인간의 어떤 면을 너무나 정확히 묘사해낸 문장을 읽을 때의 짜릿함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위대한 배우의 표정 연기나 위대한 무용수의 몸짓도 물론 훌륭하지만, 위대한 작가가 인간의 내면을 서술해 놓은 한 줄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라며 언어와 문학에 대해 갖는 각별함을 드러냈다.

 

비평의 진짜 얼굴은

나는 해석자다. 해석자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 (중략) … 원칙적으로 해석은 무한할 수 있지만, 모든 해석이 평등하게 옳은 것은 아니다. 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더 좋은 해석과 덜 좋은 해석은 있다. 이를 가르는 기준은 다양할 텐데, 나에게 그것은 ‘생산된 인식의 깊이’다. 해석으로 생산된 인식이 심오할 때 그 해석은 거꾸로 대상 작품을 심오한 것이 되게 한다. 이런 선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해석이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해석은 작품을 다시 쓰는 일이다. 작품을 ‘까는’ 것이 아니라 ‘낳는’ 일이다. 해석은 인식의 산파술이다.

- 『정확한 사랑의 실험』(2014)

신형철 평론가는 비판이야말로 비평의 본령이라는 뿌리 깊은 편견을 전복시킨 평론가다. 어떤 비평가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언젠가 그는 “정확하게 칭찬하는 비평가”가 되고 싶다고 답한 바 있다. 기자가 그가 생각하는 ‘정확성’과 ‘칭찬’에 대해 묻자, 그는 “그 표현이 업보가 된 것 같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비평’이라는 단어부터가 ‘비판’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만큼, 칭찬하는 비평가가 되겠다는 그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많았던 탓이다. 그는 “모든 작품에는 아주 사소하더라도 그 작품에만 존재하는 가치 있는 인식이 존재하고, 이를 개념화·논리화하는 것이 바로 비평”이라며 “따라서 비평은 기본적으로 작품을 존중하는 작업이고, 작품 없이는 비평가라는 존재 자체가 모순이다”라고 단언했다. 비평은 비평가가 정해놓은 답을 그저 제시하는 과정이 아니라, 작품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답이 있다는 믿음으로 작품을 천천히 뜯어보는 과정이라는 의미다. 작품과 눈을 바로 맞추려는 그의 자세는, 비평이 더 이상 창작에 열등감을 갖지 않을 만큼 비평의 지위를 올려놓은 평론가라는 수식을 가져다 줬다.

신형철 평론가는 그간 비평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로 여겨진 ‘아름다움’을 비평의 영역으로 끌어오기도 했다. 그의 문장은 유려하다 못해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러나 그는 비평에서 ‘논리’와 ‘아름다움’의 비중을 묻는 기자의 질문을 한순간에 우문으로 만들었다. “설득력 있는 논리를 뼈대로 하는 인식에 도달한 후 이를 정확하게 표현해서 독자를 움직이는 것이 먼저”라며, 결국 “삶이나 사회의 어떤 단면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문장이야말로 비평이 노려야 하는 아름다움”이라는 명쾌한 현답이 돌아온 것이다. 논리와 아름다움 중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논리가 곧 아름다움이고, 아름다움이 곧 논리라는 진단이다.

 

비평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다

신형철 평론가는 최근 작업의 방향성을 미세하게나마 전환하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약 20년간 문학 현장의 중심에 서서 비평 쓰기에 매진해왔던 그는, “서울대에 부임하게 된 시기가 글쓰기의 무게중심을 비평에서 연구 쪽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든 시기와 공교롭게도 맞물렸다”라고 이야기했다. 작업의 방향성을 전환하게 된 이유에 대해 그는 “이제는 문학 현장과 약간의 거리가 생겼다고 느끼는 데다, 보다 원론적인 주제에 깊이 파고들고 싶어졌다”라고 밝혔다. 이어 “문학 현장과의 거리는 얼마나 열심히 따라 읽느냐에 따라 결정되는데, 현재는 그 거리를 좁히는 것 외에 다른 할 일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형철 평론가가 최근 천착하고 있는 주제는 비평의 정체성이다. 그는 “1900년대 후반은 비평이 그야말로 비판의 에너지로 충만했던 시기”라며 “당시 비평가는 문학을 넘어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다”라고 운을 띄웠다. “그러나 각계각층의 전문가가 생겨난 지금은, 비평이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할지, 비평의 공공성 확보에 대한 고민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사회 전체적으로 비판의 장이 정파적으로 양극화돼버렸고, 커뮤니케이션은 점점 병들어 가고 있다”라고 지적하며, 비평의 형식이 바람직한 커뮤니케이션의 역할 모델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표했다.

이 꿈에 붙일 수 있는 이름 하나를 장승리의 시 「말」의 한 구절에서 얻었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내게 이 말은 세상의 모든 작품들이 세상의 모든 해석자들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다면 해석자의 꿈이란 ‘정확한 사랑’에 도달하는 일일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어디선가 이런 말을 했다.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들에 대한 폭력적인 단언을 즐기는 사람들도 당사자의 면전에서는 잘 그러지 못합니다. 어쩌면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늘 작품을 앞에 세워두는 글쓰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정확한 사랑의 실험』(2008)

비평은 결정적인 주장을 내세우는 순간에는 늘 작품의 문장을 먼저 인용한다. 그는 이런 특성을 들어, “비평은 언제나 상대의 말을 먼저 듣고, 증거를 먼저 제시한 후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형식”이라고 부연했다. 그는 “비평은 곧 협업”이라며 “비평의 독서는 작품에 소중한 진실이 있다는 기대를 품고 시작되는 것으로, 작품과 비평 간, 비평과 비평 간의 대화 모두 정답을 정해놓지 않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건강한 공론장의 전범으로 자리 잡을 비평의 새 가능성에 대한 전망을 그렸다.

 

문학이 아니었으면 정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면서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이것이다. 나는 문학을 사랑한다. 문학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어쩔 수가 없다. 

- 『몰락의 에티카』(2008)

무언가를 열렬하고 치열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사랑의 온기를 함빡 뿜어낸다. 문학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짝사랑이라고 일컫는 신형철 평론가에게서는 슬픔이 아닌 설렘이 느껴졌다. 그의 ‘정확한 사랑’이 세상에 오래도록 울려 퍼지기를 기원한다.

 

*가라타니 고진: 일본의 문학비평가이자 사상가.

*에티카(Ethica): 라틴어로 윤리학을 일컫는 말.

*벼리다: 날카롭게 만들다.

 

 

사진: 유예은 기자

 

eliza721@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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