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현 강사(국어국문학과)
유서현 강사(국어국문학과)

1920~30년대에 발표된 한국 단편 소설을 강독하는 세미나에 오랫동안 참여해왔다. 백 년 전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 시대를 상상하고 오늘날과 겹쳐보곤 한다. 학기 말을 맞아 학교 구석구석이 한층 분주해지는 요즘, 백 년 전을 살았던 두 명의 대학생을 떠올려 본다.

유진오의 『넥타이의 침전』 속 주인공은 법률을 공부했다. 『육법전서』를 펴놓고 기계처럼 한 조목 한 조목 내려외우는 것이 그의 생활의 전부였다. 한때는 자신을 포함한 대학생들의 무기력한 생활을 통탄하면서 각종 연설회나 사회주의 연구회에 가담했지만,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집안을 책임지게 되면서 점차 꼬리를 내렸다. 졸업 후 지방 법원의 서기가 돼 15년을 일한 그는 “어느덧…(중략)…완전히 희망도 용기도 야심도 다 잊어버린 대신에 또 아직도 희망과 용기를 가진 사람을 질투하지도 아니하도록 됐다.” 만사에 성실하면서도 무심한 그를 흔든 것은 어느 날 아들이 내뱉은 한 마디다. 아버지는 왜 큰 사람이 못 되시우? 내가 보는 잡지 속에서 잔뜩 욕먹는 사람은 아버지 같이 세상 사는 사람이야. 지나간 청년기에 차마 제기하지 못했던 물음을 아들에게서 들은 그는 마음이 무너진다.

유진오의 이 소설이 착잡하게 여겨지는 것은 비단 소설 속 내용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가 이 소설을 고작 20대 초반의 나이로 썼다는 점이 눈에 띈다. 유진오는 1928년 경성제대 법과 졸업을 앞두고 이 작품을 썼다. 현재는 친일 행위자로 비판 받지만, 대학 시절에는 조선 민족을 위한‘경제연구회’를 조직해 활동했고 빈민과 노동자의 현실을 다룬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런 청년 유진오가, 십수 년 후의 자신의 모습은 삶에 대한 욕망이 다 빠져버린 늙수그레한 지식인으로 그려냈던 것이다. 자신의 앞날을 이토록 삭막하게 상상했던 그의 내면은 어떤 상태였던 것일까.

한편, 유진오와 동년배인 강경애는 1931년 『파금』에서 또 한 명의 법학과 대학생 형철을 등장시킨다. 형철은 어쩌면 유진오의 주인공이 한때 꿈꿨으나 가지 않았던 길을 가는 인물이다. 그는 조선 농민들의 착취당하는 삶에 분노하며 혁명을 추구하는 인물로, 그런 자신의 이상과 대학에서 지식을 쌓는 현재의 삶이 너무나 괴리돼 있다는 사실에 번민했다. 그를 행동으로 이끈 것은 그 자신의 집안의 몰락이었다. 불경기에 빚이 불어나 부친이 파산하게 되자, 형철은 “이제야 바로 나의 길을 잡게 되었다. 벌써부터 잡아야 됐을 것이지….”라고 되려 마음을 다잡으며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떠난다. 항일 투쟁과 사회주의 운동이 들끓는 땅 만주를 향해서였다. 작가 강경애의 삶의 터전이자 문학의 지반이기도 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투지를 다지며 만주로 떠난 형철의 삶은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별안간 “XX에서 총살을 당했다”라는 한 마디로 마감돼 버린다. 이 급작스러운 결말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강인하고 의지적으로 보이는 강경애 역시 기실 유진오 못지않게 앞날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일 것 같다. 유진오와 강경애가 그린 두 대학생은 일견 대조적으로 보이지만 스스로에 대한 회의와 미래가 주는 압력을 겪어내는 중이었다는 점에서만큼은 같다.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두 대학생이 가졌던 고민에 답할 수 있게 됐을까?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포착돼 온 청년들의 모습을 보면 이 고민의 무게는 조금도 덜어진 것 같지 않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두 주인공의 삶이 양자택일의 문제일 수 없다는 것이다. 두 청년의 삶에 각각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라는 이름을 붙여 대조하는 것은 가능한 독법이긴 하지만 너무나 단순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유진오와 강경애가 보여주는 것은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 현실 비판의 결여와 같지 않고, 이상을 향한 투쟁의 출발지와 종착지는 언제나 현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과 이상 모두를 볼 줄 알며, 오늘날의 청년들은 고되지만 영리하게 그 사이의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덧붙여 그리하여 누구도 너무 늙거나 죽어버린 자신을 상상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이 마련돼 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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