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한국 대법원은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 지배 및 침략 전쟁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위자료로 강제 동원 피해자 15명에게 각 1억 원의 배상금을 지급할 것을 확정 판결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일본 정부로부터의 경제적 지원을 대가로 한국 정부가 대일 청구권을 포기하는 데 합의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해석 변경이라고 주장하며, 해당 일본 기업이 판결 이행에 응하지 않도록 조치했다. 이에 작년부터 한일 관계 개선에 집중하며 일본 정부와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 배상 조율을 이어온 윤석열 정부가 병존적 채무 인수 방안을 공식화해 일본의 호응을 촉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병존적 채무 인수란 기존의 채무 관계는 유지하면서 새로이 참여한 제3자가 기존의 채무자와 함께 채무를 부담하는 것을 뜻하는 법률상의 용어로, 해당 사안에서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일본 피고 기업의 채무를 인수해서 채권자인 강제 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는 방식으로 적용될 예정이다. 하지만 병존적 채무 인수 방식이 강제 동원 피해 배상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방해한다는 지적이 등장하고 있다.

병존적 채무 인수 방안은 기본적으로 피해자들의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금전적 배상에 초점을 맞춘 미봉책에 불과하다. 현재 한일 정부 간 협상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되는 것은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 등 주요 피고 기업의 기금 출연 여부다. 피고 기업이 배상에 참여하더라도 국내 기업의 기부에 동참하는 양상에 그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피고 기업의 제대로 된 배상 참여 여부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갑자기 ‘진짜’ 가해자 대신 채무를 분담하게 된 한국 기업을 중심으로 강제 동원 배상 문제를 종결지으려는 움직임은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도 강제 동원 배상과 관련한 피해자들의 요구 사항에서 우선되는 것은 ‘가해자로부터의 진심 어린 사과’지, ‘배상금’이 아니다. 주체가 누가 됐든 배상금만 지급하면 그만이라는 정부의 태도는 피해자에 대한 기만이다. 

더불어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 지배 및 침략 전쟁 수행이라는 피해 배상의 논리적 근거가 병존적 채무 인수라는 국내법적 조치에서 유명무실화되고 있다. 일본은 한일청구권협정을 통해 한국 정부에 총 5억 달러 상당의 경제적 지원을 제공한 것으로 강제 동원 배상 문제는 이미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즉, 다시 배상을 요구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국제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병존적 채무 인수안의 확정은 한국 대법원 판결을 국제법 위반으로 몰아세우는 일본의 주장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교섭 당시 일본 정부는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이에 대한 법적 배상을 부인했다. 따라서 불법 지배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이 한일청구권협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한국 대법원 판결은 분명 타당하다. 그렇다면 병존적 채무 인수안을 들고 나온 한국 정부의 저의와 목적이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정부는 강제 동원 문제를 단순히 ‘15억의 배상금’으로 해석하며 조급하게 2018년 대법원 판결 후속 조치에 나서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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