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주(동양사학과·16)
김동주(동양사학과·16)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 자하연에서 관악02 버스 타러 올라가는 길, 인문대 해방터의 익숙한 풍광 사이 이질감을 느꼈다. 게시판이었다. 스테이플러와 테이프, 종이 쪼가리가 덕지덕지 붙어있던 녹색 패널이 사라졌다. 기한이 지난 포스터와 반쯤 찢어진 대자보로, 아우성으로 가득했던 그 자리에는 메아리조차 없었다. 다만 새 게시판이 아우성을 받아들일 준비를 끝낸 채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특히 패널 왼쪽 파란 바탕에 입혀진 하얀색 ‘샤’가 돋보였다.

덕분에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일 때 따라붙을 책임감이 더 막중해졌다. 안 그래도 책임을 요구하는 일인데, 지성의 공간인 서울대에 올리는 글이라는 상징성까지 더해진 셈이다. 대자보를 붙이는 데 책임이 따르는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대자보는 말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말은 당장 내 음성을 듣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끄는 반면, 대자보는 오래도록 남아 게시판 앞을 지나는 모두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주장이 갖는 수명도 길어진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소위 ‘똥글’도 박제되면 여론을 오래 뜨겁게 달군다고 반박할 수 있다. 그래서 두 번째 이유가 중요하다. 대자보를 붙일 때는 이름을 건다. 최소한 소속 단체명을 걸고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이름을 건다는 것은 명예를 건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심지어 청자가 서울대 구성원 가족이라니, 발언에 실린 무게가 무겁다.

그렇다면 말의 무게에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을까. 대자보도 대화라는 점을 생각하면 된다. 화자와 청자를 모두 생각해야 한다. 청자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대화라 할 수 없다. 대자보도 마찬가지다. 글을 보는 사람들이 내가 건넨 메시지에 어떻게 반응할지 고려해야 한다. 내 주장이 서울대 구성원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고민 없는 대자보는 시끄러운 독백 혹은 방백에 불과하다. 나만 끄덕인 주장은 독백이고, 내 주변만 끄덕인 주장은 방백이다. 무책임하기는 매한가지다.

새 단장 전의 대자보들이 말에 얼마만큼 책임지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인권헌장 대자보는 늘 찬성과 반대가 쌍으로 걸려 존재감을 과시했다. 글감은 늘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에 대한 차별 금지로’ 늘 같았다. 주장도 대동소이했다. 특정 조항이 소수자 차별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는 주장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일 뿐이라는 주장이 평행선을 달렸다.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옳음을 강변하기 위한 수사만큼은 대자보마다 달라졌지만, 수사 속 전제 하나는 놀랍도록 똑같았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 

덕분에 촌극도 많았다. 남의 대자보를 찢고, 상대 대자보를 가리기 위해 종이를 붙이는 ‘웃픈’ 해프닝들이 벌어져 왔다. 대자보 하단 단체명에는 꼬박꼬박 서울대 명칭을 쓰면서도, 서울대 구성원이라는 인식은 없는 듯 했다. 상대에게 “말하기 전에 생각했나요?”라니, 주장을 듣지 않으면 “서울대는 유래 없는 거친 저항을 직면하게 될 것”이라니. 상대를 청자로, 동기, 선후배, 선생님, 제자, 혹은 동료로 인정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인권헌장으로 대자보를 붙이는 이들은 모두 서울대 구성원이다. 화자인 동시에 청자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대자보가 독백이나 방백이 아닌 대화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대자보에 따라붙는 책임감을, 서울대라는 공간에 따라붙는 책임감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곧 개강이다. 해방터 게시판에도 대자보가 다시 붙을 예정이다. 새로 붙는 대자보에서는 지성인으로서의 책임을 볼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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