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언젠가는 은퇴를 겪겠지만, 젊은 나이에 맞닥뜨린 은퇴는 암묵적인 ‘실패’로 받아들여진다. 내가 만난 이들은 실패했거나 실패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십수 년 동안 간절함을 투자했기에 실패가 더욱더 뼈아플 이들이었다. 그래서 실패한, 또는 실패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들에게 거북할지 몰랐다. 그래서 초짜 기자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그들에게 묻는 것이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낙성대의 한 카페에서 두산 베어스 장빈 선수를 만난 날의 잔잔한 긴장감을 기억한다. ‘기자’ 전상현의 첫 취재원이었기 때문도 있지만, 혹시나 취재원께 결례를 범하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도 있었다. 끝없는 기다림을 버티고 앞으로 꽃을 피워낼 날만 남은 젊은 현역 선수에게 ‘은퇴 준비는 하고 계시나요?’라니. 인터뷰 주제를 미리 고지하기는 했지만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려니 더 못할 말이었다. 빙빙 돌리고 돌려 간신히 질문을 건넸다. 하지만 “아뇨, 은퇴는 생각해 본 적 없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답하니 더 미안해졌다. 소심한 나는 분명 집에서 ‘장 선수가 기분 나빴으면 어쩌지?’하며 곱씹어 볼 예정이었다. 하지만 인터뷰 후 커피잔을 정리하며 장 선수가 건넨 말에 그런 걱정은 완전히 녹아내렸다. “인터뷰 재밌네요.”

장빈 선수만이 아니었다. 취재에 응해준 모든 은퇴 선수들이 기꺼이 인터뷰를 즐겨줬다. 물론 그들의 답변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은퇴에 관한 질문이 나왔을 때 그들의 반응은 모두 비슷했다. 그들은 기자와 맞추던 눈을 피해 잠시 허공을 바라봤다가 한숨을 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그 한숨의 길이만큼 자세히, 그리고 열심히 그들의 실패담을 들려줬다. 정성스레 실패한 ‘썰’을 푼 그들은 후련해 보였다. 기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준 취재원도 있었다.

특집 기사를 취재하면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사에 싣는다는 것은 독자와 기자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취재원에게도 큰 의미가 될 수 있다고 느꼈다. 취재원에게 인터뷰는 그 자체로 추억이리라. 그 추억을 구성하는 것은 인터뷰라는 핑계로 마음 한편에 먼지 앉은 채 숨겨져 있던 자서전을 누군가에게 읽어준다는 즐거움과 자신의 이름이 의미 있게 쓰인다는 뿌듯함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들이 꾹꾹 눌러썼을 삶의 한 페이지를 갱지의 한 면으로 만드는 일에 더 큰 책임감이 생긴다. 그리고 기꺼이 인생의 한 페이지를 내준 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고 싶다는 목표도 생긴다. 그래서 앞으로 더 섬세히 듣고, 더 자상히 말하며, 더 정확히 쓸 것을 다짐한다. 초짜 기자의 당찬 포부에 음을 얹어 미래 취재원에게 데이식스(DAY6)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가사를 남긴다.

“아무 걱정도 하지는 마. 나에게 다 맡겨 봐. 지금 이 순간이 다시 넘겨볼 수 있는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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