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일본인 2세 작가 고바야시 마사루의 단편소설 「가교」(1960)는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특히 한미일 안보 협력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작금의 정세에 비춰볼 때, 이 소설이 묘사하는 1952년 일본의 풍경은 사뭇 낯설다. 「가교」는 일본인 청년 ‘아사오’가 한 조선인 청년과 함께 한국전쟁에 투입되는 미군의 군수 물자를 파괴하라는 공산당의 지령을 받으며 시작된다. 상대의 정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하나의 지령 아래 같은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상황, 아사오는 속으로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신뢰란 무엇일까?”

제목이 불러일으키는 기대와 달리, 이후의 전개는 두 인물이 결국 진정한 동지로 거듭나게 된다는 예측 가능한 결말을 향해 흐르지 않는다. 조선인 청년은 작전을 수행하는 내내 아사오를 무시하고, 아사오는 청년에게 적의를 느끼며 자신의 아버지가 일본의 패전 무렵 조선인과 소련 병사에게 살해당한 사실을 자꾸만 곱씹는다. 작전이 허무하게 실패한 뒤 마침내 각자의 속내를 털어놓는 장면에서까지 둘은 결코 좁힐 수 없는 서로의 차이를 확인한다. 아사오는 부친의 죽음에 얽힌 고통스러운 기억을 들려주지만, 청년은 일본이 수천만 명의 중국인과 조선인 아버지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일본인(아사오)의 자기중심주의를 비난한다.

그러나 냉정하던 청년이 뜻밖에 눈물을 흘리며 “내 아버지도 일본인에게 살해되었어”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는 작별의 순간은 매우 미묘한 여운을 남긴다. 청년의 마지막 대사의 의미는 동일한 상실(아버지의 죽음)의 아픔에 대한 ‘공감’의 태도로도, 혹은 그런 상실의 원인인 일본을 향한 ‘원한’의 감정으로도 온전하게 해석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한일 간의 뿌리 깊은 적대를 넘어 미래의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자는 메시지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아버지의 죽음이 은유하는 주권 상실의 경험이 표면적으로는 한국과 일본에 공통된 것일지라도, 실제로 그것이 양국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다른 무게와 의미로 체험되고 해석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상기하게 될 뿐이다.

이처럼 「가교」의 독특함은 이 작품이 사실 ‘가교’의 성립을 어렵게 만드는 ‘차이’에 대해 얘기한다는 점에 존재한다. 어쩌면 화해의 가능성을 그리고 싶었던 작가 역시 양국민의 역사적 경험에 내재한 근본적 차이를 간과할 수 없었기에 결국 제목을 배반하는 서사를 완성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가교」는 갈등하는 인물들 사이에서 어떤 식으로든 ‘연대’의 가능성을 발견해 작품의 의미를 결론지으려는 해석자의 무의식에 제동을 건다. 이 소설을 떠올릴 때면, 문학연구자로서 나 자신이 그동안 너무도 손쉽게 공감, 화해, 연대 같은 단어를 사용하며 논의를 봉합해 온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한국과 일본의 바람직한 정치적 관계를 모색함에 있어서도 섣불리 화해와 상생을 주장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이다. 이번 3.1절 기념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였던 일본이 이제 엄연한 우리의 파트너가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과거사 문제를 충분하게 들여다보는 과정 없이, 한일 사이에 단단한 가교를 마련하자고 말하는 것은 공허한 수사에 불과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식민의 역사를 묻어둔 채 맺는 양국의 파트너십은 결국 미래의 갈등으로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삽화: 신윤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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