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우 부장(사회문화부)
정연우 부장(사회문화부)

고작 열세 살 난 튀르키예의 소년이 매일 열 시간씩 허리를 굽히고 헤이즐넛을 줍는다는 기사를 봤다. 전 세계에서 헤이즐넛 소비량이 가장 많다는 제과 기업 페레로의 이야기였다. 나는 그 기사를 보고 있었을 때 페레로 로셰를 양 볼에 가득 물고 있었다. 곧 그 소년이 잔뜩 쌓인 헤이즐넛을 바라보며 구역질을 했다는 문장까지 가 닿았을 때는 나도 구역질을 하고 싶어졌다. 신문사에서 밤샘을 할 때면 쉴 틈 없이 잘만 넘어가던 것인데, 그 초콜릿에 든 헤이즐넛 조각이 불현듯 불쾌한 이물감을 줬다.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구역질을 해서라도 그간 먹은 초콜릿을 모두 뱉어내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그날로 나는 페레로의 제품을 소비하지 않는 사람이 됐다. 

지난해 SPC 계열 제빵 공장에서 소스 배합기에 몸이 끼어 직원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본 것도 점심으로 파스쿠찌의 파니니를 먹고 난 후였다. 한동안은 꼭 SPC의 빵이 아니더라도, 빵을 먹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빵을 먹을 때마다 무참한 장면이 떠올랐다.

상상에 유달리 능한 나의 불매는 보통 이렇게 몸서리쳐지는 생경한 감각에서 비롯됐다. 그런 감각은 페레로와 SPC의 사례 이전에도 불규칙하게, 그리고 꽤 자주 있어 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는 감각이 조용히 쌓여감에 따라, 나의 불매 목록은 애써 기억하지 않으면 자칫 잊기 쉬워질 만큼 길어져 갔다.

불매 목록이 길어질수록 불편한 상황도 늘어났다. 친구들과 곧잘 가던 아이스크림 가게에 더는 가지 않겠다고 말해야 했고, 연인에게는 그가 선물한 옷을 더는 입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엄마가 자취방으로 배달시켜준 초코 우유를 처리하기도 난감해졌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쁨이 줄어들고, 심지어는 그것에 대해 해명해야 하는 상황이 올 때마다 낯이 뜨거웠다. 불매의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때도 있었고, 꽤나 긴 목록을 미처 기억하지 못했다가 뒤늦게 말을 번복해야 할 때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의 선택이 상대방을 민망하게 만들어 미안함이 밀려오면 나는 그만 망연해지고 말았다. 내가 얄팍한 연민을 불씨 삼아 위선을 떨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작 나 한 사람의 작은 선택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을지 회의가 들어 입맛이 썼다. 불매를 시작할 때의 감각은 잊고 냉소에 이를 때가 적지 않았다.

그런 의문에 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두려움 때문이었다. 어제는 편의점 매대에서 페레로 로셰의 대체품을 찾으며 서성이다가 결국 허쉬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신문사에 들어와 초콜릿을 까먹는데, 문득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 초콜릿에도 내가 미처 알아내지 못한 비밀이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 내가 먹는 음식이, 내가 쓰는 펜이, 내가 입는 옷이 누군가의 구역질을 제물 삼아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내가 누군가의 고통과 불행을 온 몸에 두르고 몸 속에 넣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계에 고통의 총량이 있다면 나는 그것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의 불편함과 망연함은 사소해졌고, 불매는 계속됐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나의 불매를 추동하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불매운동에 동참함으로써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싶다는 정의감보다는, 단순히 사지 않기를 선택함으로써 마음의 괴로움을 덜고 싶다는 일종의 자기 위안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고 고백한다. 앞으로도 아마 나는 이기심을 동력으로 끊임없이 끔찍해 하고 또 무뎌질 테고, 그와 동시에 무지를 핑계로 수없이 많은 이들의 고통을 소비할 수밖에 없을 테다.

그럼에도, 생생하게 상상하고 예민하게 감각할 줄 아는 인간임을 특기 삼아 끊임없이 두려워하겠다고 다짐한다. 

세상에 내가 살 수 있는 물건이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아도 나는 사지 않기를 선택하리라.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