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 베트남전 담론의 역사와 진상 규명

지난달 7일 서울지방법원은 베트남전 중 발생한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의 피해자 응우옌티탄 씨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대한민국이 3,000만 100원을 배상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베트남전 중 민간인 학살 사실과 한국 정부의 배상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한 셈이다. 국가와 이념의 이름으로 개인을 지워낸 베트남전을 어떻게 다시 기억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그릇된 전쟁, 어긋난 파병

베트남전에 관한 다각적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트남전 당시의 사회적 맥락을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베트남전은 미국의 참전부터가 그릇된 명분으로 점철돼 있었다. 베트남전 참전 당시 미국에서는 도미노 이론을 내세우며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는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고 베트남전을 정당화했다. 박태균 교수(국제대학원)는 “한 국가의 체제 변동이 주변국의 연쇄적 체제 변동을 일으킨다는 도미노 이론을 표방한 미국의 참전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집착이 낳은 오판이다”라고 설명했다.

미국의 요청에 따른 한국 정부의 파병도 충분한 대의를 갖지 못했다.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조건으로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약 32만 명의 군인을 파병했다. 박태균 교수는 “당시 정부 입장에서 미국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웠음을 감안하더라도, 미국이 요청했던 것보다 더 많은 수의 군인이 파병됐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논리는 우리가 파병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의 병력이 빠져나가 안보 공백이 생긴다는 것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나라를 스스로 지키지 못해 주한미군의 병력을 빌리고 있었던 우리가 직접적 이해관계도 없는 베트남에 군인을 파병한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라고 밝혔다.

 

국가에 의한 외면과 망각의 역사

마땅한 정당성 없이 치러진 전쟁의 한가운데 뛰어들어야 했던 참전 군인도, 전쟁 과정 중 학살당한 베트남의 민간인도 모두 피해자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정치적 필요에 따라 베트남전의 특정한 맥락만 선택적으로 확대했다 축소하기를 반복해 왔다. 

베트남전 도중과 직후에는 국가적인 반공 기치 아래 파병의 경제적 성과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는 곧 참전 군인들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1971년 2월부터 1972년 2월까지 베트남에 파병됐던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이화종 회장은 “베트남전에 대한 트라우마와 고엽제 후유증에 고통 받고 있지만, 국가 발전과 가정의 생계에 기여했다는 자긍심이 있다”라고 회고했다. 류기현 강사(역사학부) 역시 “참전 용사 대부분이 경제 개발의 초석을 놓았다는 것에 베트남전을 긍정적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결과론적 담론이 참전 군인들의 정체성을 형성한 상황에서, 전두환 정부 때 베트남전에 대한 논의가 일체 중단되며 사회적 혼란이 가중됐다. 박태균 교수는 “전두환 정부는 참전 군인의 세력 확대와 전투 수당 요구 움직임을 우려해 의도적으로 베트남전을 지웠다”라고 꼬집었다. 이화종 회장은 “전두환 정부 때 참전 기념탑을 세우려다가 특별수사부에 끌려가서 고초를 당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 피해자에 대한 논의는 시작조차 되지 못했다. 

참전 용사들과 시민단체의 목소리가 나오며 이들을 더 주목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정부의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1992년 경부고속도로 점거 농성으로 쟁취해낸 ‘고엽제후유의증 등 환자지원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로 베트남전의 참전 용사들에 대한 보상이 간신히 화두에 올랐다. 이후 1999년 한겨레21이 베트남전 중 자행된 퐁니·퐁넛 마을 민간인 학살을 보도하면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피해 조사를 요구하는 담론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참전 용사에 대한 예우와 학살 피해에 대한 책임 이행 사이에서 정부는 어떤 움직임도 취하지 않은 채 그저 침묵하기만 했다.

한베평화재단 권현우 사무처장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목소리는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라고 설명했다. 2019년 청와대에 청원서가, 지난해에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에 하미 마을 학살 진상규명 신청서가 제출됐다. 하지만 권 사무처장은 “2019년 제출된 청원서에 대해 국방부는 거부의 뜻을 밝혔고 지난해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된 하미 마을 학살 건은 조사 개시 여부조차 10개월 넘게 결정되지 못하고 있다”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원고가 일부 승소한 지난달 판결에 대해서도 이종섭 국방부장관은 “민간인 학살은 전혀 없었다”라고 밝히는 등 여전히 이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정부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동안 참전 용사와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갈등하는 양상이 생겨났다. 법무법인 해마루 임재성 변호사는 “정부가 외면하는 사이 참전 군인들은 시민단체와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자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라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증언이 거짓으로 몰리기도 했다. 정치적 이해관계와 국가의 이기심 아래 전쟁의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됐던 학살 피해자와 참전 용사가 갈등하는 기형적 구조가 고착된 것이다.

 

반성과 책임을 위한 기억 모으기

베트남전 학살 사실과 한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이번 판결은 베트남전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이 돼야 한다. 임재성 변호사는 “역사를 바르게 성찰하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진상규명의 과정을 꼭 거쳐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베트남전 시기 대한민국 군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 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한 더불어민주당 강민정 의원은 “우리가 일본에 위안부 및 강제징용 문제의 책임을 진정성 있게 물으려면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도 끌어내고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더군다나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다. 권현우 사무처장은 “베트남에 있는 한국군 전쟁범죄 피해자들은 이미 고령”이라며 “앞으로의 10년은 우리 정부가 베트남전 민간인 피해를 책임지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10년이다”라고 시급함을 강조했다.

진상 규명을 위해서는 베트남전 참전 용사의 증언 반영을 넘어 그들의 직간접적인 참여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강민정 의원이 발의한 특별법이 통과되면 피해조사위원회가 설치돼 한국군의 전쟁범죄를 조사하게 된다. 해당 법안에 대해 이화종 회장은 “참전 용사가 참여한다는 조건 하에 법안에 동의한다”라고 밝혔고, 이에 강 의원은 “참전 용사들이 추천하는 위원이 위원회에 포함되는 방안으로 반영할 수 있다”라고 답했다. 

나아가 참전 용사를 베트남전의 피해자 중 하나로 인식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박태균 교수는 “참전 용사도 베트남전의 피해자인데도 이들을 가해자로 모는 담론이 형성되는 것은 정부가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라며 “원인과 과정이 가려진 베트남전을 다시 규명하면서 가해자로서의 정부 책임을 확실히 해 참전 군인의 피해를 직시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올해로 파월 군인들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지 반세기가 넘었다. 이제는 베트남전에 대한 진실을 명확히 규명해 참전 용사와 학살 피해자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역사를 재정립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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