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이 책 | 한국 사회와 인문·사회학의 관계를 묻는 『연구자의 탄생』

연구자의 탄생

김성익 외 9인

292쪽

돌베개

2022년 1월 21일

 

 

 

 

지난해 출판된 도서 중 중앙도서관에 구입 신청 건수가 가장 많았던 책은 『연구자의 탄생』이다. 2000년대 이후 영문학, 감정사회학, 여성학, 신자유주의 등 다양한 분야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척하고 있는 10명의 저자들은 각자의 연구가 어떤 궤적을 거쳐 현재의 한국 사회와 상호작용하고 있는지 밝힌다. 이 책을 향한 관심은 연구의 조건과 연구자의 환경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는 동시대 연구자들의 문제의식을 반영한다.

 

연구를 둘러싼 새로운 조건들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곳곳에서 다양한 쟁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디지털 사회로의 진입, 노사관계의 유연화, 코로나 팬데믹 등 다양한 사회적 변수가 난립하면서 이를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인문·사회 분야의 과학적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일례로 젠더교육연구소 윤보라 연구원은 네티즌의 등장이라는 사회 변화로부터 뷰티 커뮤니티의 여성 이용자들이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게 된 현상을 연구했다. 동시에 새로운 의제의 과도한 팽창은 이를 설명할 새로운 언어를 요구했다. 이승철 사회학자(인류학과)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변화가 새로운 좌표를 요구하고 있음에도 이를 설명할 적절한 담론과 언어를 가지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이에 그는 각 정치 진영의 정체성이 혼란해지는 등의 사회 변화 속에서 다양성, 혁신, 다문화, 참여 민주주의 등의 말을 다르게 이해하는 방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혼란한 사회 속에서 학계의 기존 질서 역시 크게 변화했다. 학계 내 과열된 경쟁에 회의적인 시선을 가진 연구자들이 많아지면서 대안적인 연구 환경을 마련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실제로 대학교 내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해 교수나 연구자가 돼야만 했던 전통적인 연구자 양성 과정에서 벗어나, 대학원을 졸업하지 않고 비영리단체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현장의 연구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요컨대, 연구자라는 정체성을 기존의 학문 패러다임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현대 인문·사회계 연구자들은 연구에만 집중하기에는 상당히 취약한 여건에 놓여있다. 천주희 문화연구자는 대학원이 대학과 달리 개인의 선택으로 여겨질뿐더러 평등한 교육권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그는 “여성 연구자를 위한 정책 지원은 출산이나 육아로 연구 활동을 잠시 중단한 연구자를 위해 인건비 일부를 보전하는 데 불과하다”라며 “심지어 그런 지원들은 대부분 공과계열에 한정돼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연구자가 되는 것이 일종의 지적 사치로 여겨지는 현실 속에서, 인문·사회 분야 연구자들은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자기 착취적 방식을 체득할 수밖에 없다.

 

연구자는 어떻게 탄생하나

이렇듯 대내외적 조건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들이 연구를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아마 각 연구자의 생의 궤적에서 연구라는 행위가 각별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연구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연구가 갖는 의미를 설명한다. 천주희 문화연구자는 연구가 “닫힌 문을 두드리는 일”이라고 말하고, 배주연 연구교수(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는 “영화들의 발화장에 기꺼이 뛰어들어 이론에 적힌 문자의 의미 그대로 사물과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작업”이라고 밝힌다.

열 명의 저자들은 연구자가 가져야 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던진다. 모든 연구의 시작에 있어서 어떤 문제에 대한 의문과 고찰은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이 저자들의 공통적 견해다. 연구자와 작가를 구분 짓는 일이 문제라고 작성한 안은별 씨(일본 도쿄대 학제정보학부 박사과정)는 “연구란 연구자의 진정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돼야 한다”라고 역설한다. 해외에서 한국을 연구하는 정치사회학자로서의 소고를 쓴 양명지 사회학자(미국 하와이대 사회학과)는 2016년 촛불집회에 반발해 ‘역사상 최대 규모의 보수집회’가 발생하는 현실을 보고, 한국사회의 극우 정치에 사람들이 동원되는 방식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또한, 배주연 교수는 남자들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처절하게 싸우는 장면을 그리는 홍콩 액션 영화를 보며 아시아 남성성과 젠더 담론에 관한 문제의식을 갖기도 했다.

연구자들은 무엇보다도 복잡다단하고 모순적인 현실을 ‘반지성주의’ 같은 언어로 일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중적인 인간과 사회를 단순하고 이분법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은 일종의 오만에 가깝다는 것이다. 오혜진 문학평론가는 연구자가 세계의 변화를 손쉽게 퇴행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역사는 언제나 진보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오류일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윤보라 연구원은 현실을 단순히 냉소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간에 대한 다면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연구가 어떤 식으로든 여러 문제의 맥락을 복원해 독자로 하여금 연구물에 대해 사유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좋은 연구는 독자가 연구 자체는 물론, 연구에 담긴 현실의 맥락에 관한 의문을 갖게 만드는 연구다. 현실을 파편화하지 않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애정을 연구의 기반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책은 전하고 있다. 적절한 언어로 어지러운 현실을 맥락화하는 작업은 지금껏 설명되지 못했던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창조하는 일이다. 냉소는 쉽고 진정한 애정을 가지는 것은 어렵다. 그렇기에 어쩌면 연구자는 현실에 대한 개인적 회의를 넘어 이를 사회적 언어로 환원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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