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열 수습기자(취재부)
박승열 수습기자(취재부)

갈등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흥미롭다.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힌 상태. 말마따나 갈등은 그만큼 복잡하다. 세세히 따져보면 이 세상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 한 명 없다. 난관에 봉착한 나머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한다. 알렉산드로스가 매듭을 단칼에 끊어냈듯이 누군가 이 문제를 서둘러 해결해줬으면.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요절했고, 그의 제국은 분열됐다. 현실은 냉정하고, 모두가 만족하는 해피엔딩은 대개 존재하지 않는다.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은 늘어지기 마련이고, 점차 세간의 관심도 옅어진다. 결국 병폐는 그대로 남고, 그 폐해는 가장 약한 자부터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갈등은 가능한 발생하지 않아야겠으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갈등의 풍요 한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 지난 6일(월)의 외교부 기자회견을 둘러싼 논란이 대표적이다. 기자회견을 통해 외교부는 병존적 채무 인수를 통한 강제 동원 문제 배상안을 확정했으나, 피해자, 유족들과 야당의 반발은 거세다. 일본의 직접적인 사과도 없고, 일본 기업의 배상도 확정적이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피해자와 유족들,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을 강조하는 일본. 이 양자 간의 대립은 첨예하다.

해결의 실마리를 쥔 것은 정부다. 윤석열 정부는 양극단에 있는 다른 두 당사자 사이에서 중재자 이상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 ‘한국’ 정부이므로 피해자와 유가족을 대변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외교적으로 일본의 관계 악화를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로 대변인이자 중재자라는 충돌적인 역할을 해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 정부는 각기 다른 두 역할 사이에서 헤매 왔다. 어느 순간에는 대변인으로서 피해자와 유가족 측의 입장에 강하게 동조했다. 문재인 정부는 한일관계 악화를 감수하고 2018년 대법원 판결의 충실한 이행을 고집했다. 그러나 또 다른 순간에는 한일관계 완화를 우선시하는 판단이 내려지기도 했다. 유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병존적 채무 인수를 이행하려 하는 윤 정부가 그 예다. 그러나 어느 쪽도 갈등을 해결하는 정답은 아니다.

그러므로 윤 정부는 알렉산드로스의 최후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으나 그 유산은 일종의 환상에 불과하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제국은 통치력을 상실해 네 개로 분할됐다. 매듭을 풀어내는 고난을 뛰어넘고 단칼에 잘라낸 대가다. 윤 정부도 알렉산드로스처럼 사회 갈등의 해결을 위한 명쾌한 해답을 가진 듯 행동하고 있다. 지하철 점거 시위에서 이번 강제 동원 배상 문제까지, 마치 무엇이 올바른지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사회 갈등에서 선악은 구분하기 어렵다. 성공적인 정권으로 기억에 남고자 한다면 윤 정부는 갈등을 대하는 태도를 재고해야 한다.

모든 갈등은 당사자 간의 욕구와 가치가 충돌하며 발생한다. 갈등을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당사자의 가치관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 납득 가능한 중재안을 도출하는 것 역시 지지부진해지기 마련이다. 피해자와 그 유족들이 중재안에 납득하지 못하는 한 과거사 문제도 우리 사회에 영원히 남는다.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부당한 과거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윤 정부는 갈등의 이런 특질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갈등의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에 가깝고, 긴 시간이 필요하다. 고로 정답을 찾기보다는 갈등을 겪고 있는 당사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갈등의 해결 과정에서, 당사자들이 삶을 보전할 수 있도록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덧붙여 인내해야 한다. 납득 가능한 해법이란 단칼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양자 간의 긴밀한 조율을 돕고, 온전한 해결까지 지원을 이어가야 한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았다”라는 존 헤이우드의 격언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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